나는 딱히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건 민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살아온 환경이 그리 힘든 것도 아니었는데 쭉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특별히 비관적인 사람이어서 그랬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치만 세상이 살 만한 곳으로 보인 적이 없었다. 그냥 살아 있으니 사는 거지. 인생이란 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게임이었다. 인간으로 또 태어나고 싶냐고? 절대 아니. 내가 겪은 삶이 이런데 누굴 보고 '인생 한 번 살아봐' 한단 말인가.
그치만 국가는 입장이 다르다. 자궁이 궁한 시대에 멀쩡한 자궁을 가진 여자가 애를 안 낳겠다고 하니 가만 둘 수가 없는 거겠지. 지역별 자궁 개수까지 셀 정도로 자궁에 집착하는 인간들이니 실망스러울 것이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애 하나는 낳고 죽어야 되는데 요즘 여자들은 말을 들어먹질 않는 거다. 0.76명. 1명도 안 낳고 죽는다니 그들로선 눈이 뒤집힐 일일 수도 있겠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근데 이상하다. 국가가 애를 못 낳게 했던 시절도 분명히 들어봤다.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였던가. 주체 못 하고 애를 낳는 건 미개하단 뉘앙스가 느껴지는 구호로 피임을 권하던 그들 아닌가. 그때나 지금이나 애 낳는 일에 관해 '일해라 절해라' 하는 국가다. 키워주지도 않을 거면서 낳으라고 성화다. 못 하면 맘충 되고 잘하면 극성맘 되는 게임에 누가 참여한단 말인가. 누굴 바보로 아나.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대의 이유는 내가 코로나 백신을 2차까지 맞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애 낳았을 때 애한테 안 좋은 영향이 간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으셨다나. 이 말을 듣고 몇 주째 모욕당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나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처음엔 기분의 정체를 몰랐다. 근데 자꾸 곱씹다 보니 알게 됐다. 이건 나를 인간이 아니라 자궁으로 보는 소리여서 기분이 나쁜 거였다. 만날 때마다 다정하게 대해주신 분이다. 그래서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백신 맞은 내 몸이 아플까 봐 걱정된다는 게 아니다. 백신 맞은 내가 남자친구한테 뭔가 병균을 옮길까 봐 우려된다는 것도 아니다. 백신 맞은 여자가 낳은 손주가 싫다는 것이다. 백신 맞은 여자의 자궁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나에게 전한 남자친구가 미웠고 조속히 사과해주길 바랐다. 그치만 그는 내가 아무리 화가 난다고 말해도 그럼 엄마랑 연을 끊으라는 말이냐며 기다리라고만 한다. 어머니가 반대하시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 누그러지지 않겠냐며.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서 그런 거라며. 끝까지 반대하면 가족이랑 손절하고 나와 결혼할 테니 결혼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다. 결혼 까짓 거, 못 하면 못 하는 거지. 내 마음에 끝내 얹혀 내려가지 않는 체기는 그가 그 말을 하면서도 나한테 제대로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그 말이 나를 자궁으로 보는 말임을 알지 못하는 남자라는 것 때문이다. 내 눈엔 들보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그의 눈엔 띄지도 않는 이런 상황이 끝없이 계속될 텐데, 그 때마다 나는 뭐가 문제인지 설명해야 할 것이고 그는 그런 나를 피곤해하겠지. 그런 미래가 그려져서 두렵다. 이게 나의 기우이길 바라지만 나는 그를 오래 알아왔고 이런 '설명'들을 반복해왔다. 그런데 나는 그가 그중 절반이라도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을 이해했다면 이번 상황에서도 그 말을 내게 절대 전해서는 안 됐다는 걸 알았을 텐데.
피곤하다.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나를 자궁으로 보는 말들에 대해 "내 자궁은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무던하고 착한 너네, 공부 좀 하고 오면 안 되겠니. 네이버에 검색도 안 해보고 일일이 물어보는 신입처럼 나 좀 귀찮게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