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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Jun 01. 2024

파일명 : 데스노트_회사 ver_최종의 최종의 최종

카톡! 
애니, 오늘 회의는 오후 4시로 미뤄야겠어요!


이미 출근할 때부터 오전 11시에 잡아 놓은 대표님과의 회의는 절대 불가능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대표님이 술을 마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술 마시기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람이 바로 대표님이었다. 


프리랜서 조직에 홀로 마케팅 일을 하는 사람이 된 나는 업무 보고도 대표님께, 회의도 대표님과 해야 했다. 월요일 프리랜서분들과 함께 하는 주간 회의도 참석하고, 화요일&금요일 대표님과 마주 보고 앉아 마케팅 회의를 해야 하는 건 꽤 지옥 같은 일이었다. 


홀로 월급을 받아가는 사람이라는 게 서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월요일 전체 회의 땐 동료들한테 얘기할 것을 홀로 생각하고 정리해 참석해야 했고, 회의가 끝나면 회의 때 나왔던 얘기를 정리해야 했다. 화요일과 금요일엔 마케팅에 대해 "이번에 ~~ 을 고민해 보았고, 그래서 ~~~ 을 할 예정입니다"라며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상상과는 반대로 월요일 회의에선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앉아있기 바빴고, 마케팅 회의 땐 "어... 음... 그게.. 넵... 해보겠습니다..." 라며 '넵'병 걸린 마냥 대답만 하며 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건 대표님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뭔 놈의 회사가 맨날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매번 즐거운 걸 바라는 대표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나는 능력부족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출근길마다 꽃가루와 빵파레, 레드카펫을 깔아 놓고 하루는 앞 구르기 하면서 출근, 하루는 발차기하면서 출근, 하루는 옆으로 스쿼트 하면서 출근하라고 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매일 아침 출근해서 데스노트를 적는 거였다. 영화 데스노트처럼 심한 걸 적지는 않고 그저 노션 페이지를 켜고 어제 쌓아놓았던 분노를 와다다 적는 것이 나만의 데스노트다. 하루는 프로넵병러에 걸린 나를 불쌍해하며 적었고, 하루는 여행 계획 세우다 쥐꼬리 만한 월급 받고 24시간도 부족하게 사는 나를 가엽게 여기며 글을 썼다. 



출처 : 구글 이미지
자, 알아 들었지? 다음 회의 때까지 준비해 오는데 재밌는 거!
모두가 즐거워할 수 있는 거여야 해



진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건 '재밌는 거' '즐거운 거'였다. 나는 안 절거운데, 즐거운 걸 만들라니요. 재미가 있어야 한다니요. 이상하게 회의만 했다 하면 마지막엔 항상 '즐겁고! 재밌게!'로 끝이 났다. 그럴 때마다 대학생 시절 술게임으로 자주 했던 베스킨라빈스31 게임만 생각나 고통스러웠다. (귀엽고! 깜찍하게! 써리 원!)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8시까지 회사 의자에 앉아 회의 때 나온 걸 생각해 보지만 굳을 대로 굳어버린 내 머리는 더 이상 아이디어를 뿜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뭔가 하나 생각해서 가져가면 그때 회의에서 한 내용은 이게 아니란다. 속이 뒤집어지는 순간이다. 


출처 : 구글 이미지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해서 난 다시 데스노트를 켜놓고 한 바탕 입으로 뱉을 수 없는 말들을 후루룩 적는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

1. 회의시작과 동시에 빨간 버튼을 눌러 회의 내용을 녹음할 수 있는 녹음기

- 나중에 말 바꾸기 금지용

2. 저녁 7시 이후 카톡 보내지 않을 거라는 서약서

- 워라밸을 지키기 위한 용도


순서대로 적다 한숨만 푹 내쉬었다. 적는다 한 들 뭐가 달라지나. 괜히 내 손가락만 아프지.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아이유 '팔레트' 노래에 괜스레 울컥해진다. 


지은아 뛰어야 돼. 시간이 안 기다려준대. 치열하게 일하되 틈틈이 행복도 해야 해. 


치열하게 일만 하고 틈틈이 행복은 못하는 월급 180 받으며 매일 아침 데스노트를 쓰던 정규직 마케터는 결국 6개월이 지나서야 사직서를 내고 지옥을 탈출했다. 지금은 웃긴 에피소드의 하나로 적을 수 있었지만, 그때 받은 상처는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남아 지금도 가끔 누군가 얘기를 꺼내면 동공이 터질 정도로 하나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어느 이상한 스탑해야 하는 스타트업, 혹은 조ㅈ소기업에서 가슴에 사직서 품으며, 매일 데스노트를 적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어서 빨리 그곳을 탈출하라 말해주고 싶다. 쥐꼬리 만한 월급이 모두 병원비로 나가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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