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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Jun 28. 2023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3)

허영의 그림자 속 예술의 향유 - 03. 술집

가을은 달콤하게 무르익어가며 독서를 부추겼다. 이때다 싶었는지 독서 모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정이 열리며 더할 나위 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지수는 가을과 미디어의 합작에 휩쓸려 고상한 취미라는 인상에 끌렸다고 말하며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멤버들에게는 전혀 관심 없었다. 하지만 알량한 허영심을 채우기에는 이만한 곳이 또 없었던 걸까, 어쩜 책을 그리 많이 읽으시다니 교양이 넘쳐 보이세요, 같은 말을 꽤나 즐기는 그는 간만에 나선 외출에 자연스레 모임 일정을 보게 되었다. 아침에나 겨우 독서를 하고 오후에도 카페, 저녁에도 술자리 일정, 온통 친목을 위한 자리밖에 없었다. 차라리 근처 상영관에서 영화나 보는 게 더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수는 극장 상영작 목록을 훑어봤다. 온통 같은 배급사에서 찍어내듯이 만들어내는 상업 영화들 뿐이 없었다. 도대체가 배우며 스토리며 뭐 하나 달라지는 게 없는데 우리도 우리지만 다음 세대는 고전영화 하나 없는 세대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지수는 언짢은 표정으로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보는 이름투성이인 독립영화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인지 지수는 독립영화는 현실감각 없는 예술 병에나 걸린 아마추어들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은연중에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영화 한 편을 고르는데도 이토록 오만하기 짝이 없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근처 카페도 들렀다가, 작은 소품샵들을 들르며 오롯한 주말을 무심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가을은 꽤나 심심한 계절일지도 몰라.


해가 저문 지도 오래,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지수는 자신도 놀랄 일을 하고 말았다. 다음날은 월요일이고 출근은 여느 때처럼 이를 텐데, 이 시간에 술집이라니, 그것도 집에서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곳에서. 게다가 이미 집 방향으로 탄 지하철을 내려서 다시 회귀하는 일은 꽤 적극적인 본인의 모습이었기에, 겨우 우주의 참석을 봐버렸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충분했다. 한강 이후 하루도 우주에 대한 생각이 난 적은 없었지만, 사실 심해 깊은 곳에선 언제든 기다렸던 것일까 싶을 만큼 당연히도 가야 하는 결정 같았던 지수였다. 우주를 다시 마주하는 오늘은 가을이 겨우 고개를 들 무렵에서 밤 한 톨 아람이 될 때까지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뒤늦게 도착한 술집에는 이미 비틀거릴 만큼 취한 사람들이 절반 남짓 되어 보였다. 가장 끝자리에 앉아있는 우주를 발견한 지수는 해맑게 당연하다는 듯이 옆자리에 앉아선, 저 그 영화 봤어요,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지수를 발견한 우주 또한 어느 한구석도 다르지 않은 마음의 모습이었을까,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으로, 기다렸어요, 라며 반기는 그였다. 그들은 시끄러운 시내 술집에서 둘밖에 없는 냥, 오래된 친구를 마주한냥, 신이 나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주는 좋은 영화라고는 생각했지만 특별히 더 사랑할 구석을 찾지는 못하였다고 말했다. 지수는 약간 긴장한 듯, 우주와 다른 감상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시작했다. 주인공은 누구보다 솔직하고 투명한 사람이고, 아주 세심하게 조각된 캐릭터라고, 이 영화의 메시지는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여성이 스스로를, 타인을, 욕망을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낸 것만으로도 가치가 크다고, 완벽해서가 아니라 사랑스러워서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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