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재론과 언어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by 이랑

리드 요약

이랑은 『영화란 무엇인가』의 첫 단원인 「존재와 언어」를 영화 기법이나 역사 설명을 위한 장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선언으로 설명했다. 이 책은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기보다는, 영화가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가를 구분하려는 시도이며, 그 점에서 바쟁은 상당히 교조적이고 오만해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분명한 기준을 세우려는 비평가라고 보았다.

이랑에 따르면 바쟁은 영화의 기원을 회화에서 출발시키는데, 이 지점이 가장 문제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바쟁은 회화가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시기에 사진이 등장하면서, 회화는 더 이상 현실을 복제하는 기능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고, 사진이 그 역할을 대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랑은 이 관점이 회화를 지나치게 좁게 이해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회화는 단순히 현실을 닮게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 자체가 예술이며, 단순한 ‘대용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보는 것은 회화에 대한 오만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바쟁이 말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는 ‘미학적 열망’과 ‘복제의 욕망’이다. 미학적 열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복제하기보다는, 현실보다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어떤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고, 복제의 욕망은 현실과 최대한 동일한 이미지를 남기고자 하는 충동이다. 바쟁은 사진과 영화가 이 두 욕망 사이의 긴장 속에서 탄생했다고 보는데, 이랑은 이 구분 자체는 흥미롭다고 평가했다. 다만 바쟁이 사진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객관적 매체’로 규정하는 지점에서는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랑은 사진이야말로 매우 주관적이고 폭력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디를 크롭하느냐, 어떤 순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특히 전쟁 사진처럼 대립 구도가 분명한 상황에서는 사진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쟁은 사진을 객관적 기록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밀어붙이는데, 이랑은 이것이 이후 장들을 전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전제 조건에 가깝다고 보았다. 실제로 바쟁의 서술은 사진이 객관적이라고 말해놓고, 곧바로 촬영자의 선택과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스스로 충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논리는 기술과 예술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반복된다. 바쟁은 영화라는 관념, 즉 ‘움직이는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포착하고 싶다는 욕망’이 먼저 존재했고, 기술은 그 욕망을 뒤따라 발전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랑은 이 주장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기술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과연 얼마나 구체적인 욕망이 가능했을지, 그리고 기술자들 역시 영상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왜 배제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랑에게 이 대목은 바쟁이 예술가의 입장에서 기술자를 과도하게 낮춰보는 지점이자, 예술사적·마르크스적 논리를 무리하게 뒤집은 부분으로 읽혔다.


그럼에도 이랑은 바쟁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3장 이후라고 설명했다. 1·2장이 영화와 영상 매체의 탄생에 대한 이론적 토대라면, 3·4장은 본격적으로 영화가 지향해야 할 윤리와 연출의 기준을 제시하는 장이다. 여기서 바쟁은 탐험 영화, 다큐멘터리, 르포르타주 영화를 예로 들며, 영화가 현실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어떤 연출은 허용되고 어떤 연출은 금지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나눈다.


이랑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바쟁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관객을 속이기 위한 연출이다. 현실에 참여하지 않은 채 밖에서 조작하는 연출, 존재할 수 없는 사건을 사실처럼 가장하는 연출은 영화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규정된다. 반면 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출, 혹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열하는 정도의 연출은 허용된다. 예컨대 아이와 사자가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을 직접 촬영해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금지되지만, 각각을 따로 보여주어 관객이 상황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허용되는 연출이다. 바쟁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연출이 현실을 배신하지 않는가라는 윤리적 기준이다.


이러한 논리는 ‘금지된 몽타주’ 개념으로 이어진다. 바쟁은 몽타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의미를 강요하고 관객을 조작하기 위한 몽타주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본다. 반대로 감각을 전달하거나 서사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몽타주는 허용될 수 있다. 이랑은 이 지점에서 바쟁이 매우 세세하게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나누려 한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이 책 전체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결국 이랑이 정리한 바쟁의 핵심은 이것이다. 영화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며, 연출과 편집은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라는 것. 이 책은 영화를 대중적 오락으로 확장하기 위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영화를 하나의 고상한 예술로 유지하기 위해 설정한 엄격한 기준에 가깝다. 이랑은 이 점에서 바쟁의 태도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 오만함과 단정함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도 읽히는 힘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책은 영화이론서인가, 영화에 대한 ‘태도 선언’인가


이랑 (리드)


이랑은 「영화란 무엇인가」를 영화의 기법이나 역사 설명서가 아니라,

영화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선언으로 읽었다.


바쟁은 영화가 무엇이 ‘가능한가’를 묻기보다, 무엇이 해도 되는 것 /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려 하며,

이 점에서 글 전체가 매우 교조적이고 오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재혁

재혁은 이 책을 영화 언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역사적 이론서에 가깝게 읽었다.
이랑처럼 강한 규범성에 집중하기보다는,

“아, 이 사람은 영화가 이렇게 발전했다고 이해하고 있구나”
라는 식으로 거리감을 두고 흐릿하게 수용하는 태도였다.

다만 3·4장에서 “어떤 영화가 더 정확한 영화인가”를 가르는 기준을 세우는 부분은 흥미로웠다고 평가했다.


태웅

태웅은 초반부를 영화 예찬을 위한 밑밥에 가깝게 받아들였다.
회화 → 사진 → 영화로 이어지는 서술을

“부족한 걸 하나씩 채워가며 영화의 위대함을 강조하려는 글”
로 인식했고, 아직은 이 이론을 현대 영화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태현

태현은 바쟁이 비평가이면서 영화를 직접 찍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오는 한계를 지속적으로 의식했다.
규정을 너무 많이 세우는 태도, 발명가·기술자를 낮게 평가하는 시선에 대해

“예술가의 입장에서만 말하는 사람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회화 → 사진 → 영화 : 존재를 복제하려는 욕망에 대하여

이랑 (리드)

이랑은 바쟁의 회화-사진 논의에서 가장 비판적이었다.
바쟁이 회화를 “현실을 모방하는 단계”로 단순화하고,

사진을 “객관적 복제”로 규정하는 태도를 오만한 예술사 인식으로 보았다.

회화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모방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 자체가 예술

사진 역시 크롭, 각도,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폭력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음

이랑은 특히 바쟁이 "사진은 객관적이다"라고 전제해놓고,

곧바로 “찍는 사람의 선택”을 말하는 논리적 충돌을 지적했다.


태웅

태웅도 이 지점에서 이랑과 유사한 의문을 가졌다.
사진의 객관성을 강조해놓고, 다시 주관적 선택을 말하는 부분에서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그는 이를 시대적 한계로 이해하려 했다.
사진이 아직 예술 매체로 충분히 인식되지 않던 시기의 사고라는 점에서 일정 부분 납득한다고 보았다.


재혁

재혁은 이 논의를 기능적 맥락에서 해석했다.
바쟁이 말한 객관성은 사진의 “사회적 사용 이전 단계”,

즉 기록 매체로서의 기능을 기준으로 한 것일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사진의 폭력성과 프로파간다적 사용에 대한 논의는

1·2차 세계대전 이후, 수전 손택 이후

본격화되었다는 사상사적 보완을 제공했다.


태현

태현은 이 논의 전반에서

“이 사람은 기술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예술가 같다” 는 인상을 유지했다.
사진과 기술을 너무 도구화하고, 예술의 관점에서만 재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정리했다.


기술은 욕망을 따라왔는가, 욕망이 기술을 따라왔는가

이랑 (리드)

이랑이 가장 길게 설명하고, 가장 강하게 비판한 부분이다.
바쟁은 "영화라는 관념(욕망)이 먼저 있었고, 기술은 그것을 뒤따라 실현했을 뿐" 이라고 주장한다.


이랑은 이 논리를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 얼마나 구체적인 욕망이 가능한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가

기술자 역시 영상에 대한 욕망을 가졌을 가능성은 왜 배제하는가


이랑은 이를 “예술가로서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오만한 말” 이라고 표현했다.


태웅

태웅은 이 주장에 대해 “반반”의 태도였다.
그 시대 예술가들이 기술자에게 느꼈을 열등감·시기심, 그리고 예술가적 자의식의 산물로 이해하며

“저 시대라면 저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받아들였다.


태현

태현은 이 부분에서 특히 기술자 폄하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기술을 “정신 사나운 발명” 정도로 취급하는 태도에 대해

“발명가를 너무 아래에서 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재혁

재혁은 이 논의를 마르크스적 하부구조/상부구조 논쟁의 변주로 이해했다.
바쟁이 상상력(이데올로기)을 앞세우는 입장이라는 점은 인지했지만,
그 옳고 그름을 강하게 판단하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정도의 거리에서 받아들였다.


해도 되는 연출 / 하면 안 되는 연출

이랑 (리드)

이랑은 3·4장을 통해 바쟁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다.

영화는 현실에 직접 참여한 상태에서의 연출은 허용

관객을 속이기 위한 연출, 현실을 가장하는 연출은 금지

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출은 허용

존재할 수 없는 사건을 사실처럼 만드는 연출은 거짓


예시로

아이 + 사자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편집하는 것은 허용

실제로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는 촬영은 금지
라는 식의 윤리적 기준을 설명했다.


태웅

태웅은 이 기준에 상당 부분 공감했다.
인위적인 몽타주, 과도한 연출을 싫어하며


“굳이 없어도 되는 욕심”
으로 보는 태도가 바쟁과 닮아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태현

태현은 이 규정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연출과 속임의 경계가 결국 주관적 판단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재혁

재혁은 이 논의를

예술영화 vs 상업영화의 기준으로 연결했다.


상업영화는 관객을 “어떤 상태로 만들기 위해” 강요하지만,
바쟁의 기준은 분명히 상업영화에 불리한 규칙이며,
그 전제에 동의한다면 바쟁의 주장도 납득 가능하다고 정리했다.


종합 정리


이랑: 바쟁을 가장 깊이 이해하면서도 가장 많이 비판
→ 핵심은 “영화를 존재와 윤리의 문제로 본다”는 점에 있음

태웅: 미학적 취향 차원에서는 상당 부분 공감, 다만 시대 적용에는 회의적

태현: 기술·발명가에 대한 시선, 과도한 규정에 지속적 의문 제기

재혁: 이론의 역사적 맥락과 기능적 의미를 중심으로 거리 두고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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