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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망설여진다면

by 애니마리아

오랜만에 감사 일기를 펼쳤다. 다른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중간에 드문드문 쓴 감사 일기가 눈에 들어온다.


사실 ‘사랑합니다’는 영혼을 담는다면 아무에게나 할 수는 없는 말이다. 하지만 남녀노소, 관계의 거리에 상관없이 ‘감사합니다’는 누구에게나 할 수 있다. 나의 목소리로 내가 주체가 되어 상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실리를 따지지 않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진심을 담아 미소 어린 눈빛까지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영혼 없이 하는 말일지라도 감사는 상대로 하여금 가치를 느끼게 한다. 누군가를 가치 있게 만들고 나 자신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명 인사나 주변의 누군가가 그 식상한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 말을 해서 뭐 해, 되돌아오는 것도 없는걸’이라는 생각에 꾸준한 실천이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상대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같은 따스함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더욱 괜히 했다는 후회가 들기도 하는 말.


작은 목소리로 소심하게 감사를 표해도 상대가 별 반응이 없을 때면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나의 감사를 알아주지 않았다는 서운함 때문일까. 나만 일방적으로 마음을 열었다는 억울함 때문인가. 아니면 정성이 부족한 태도로 한 말이라 상대가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괜한 상상을 하는 것일까. 나도 과거에는 이런 눈치를 보며 감사의 표현을 간헐적으로 했다. 하지만 큰 소리로 하기 부끄러울 때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감사를 표하려고 한다. 말로, 글로, 때로는 그저 마음속 기도로.


몇 년 전 한 신자분이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말을 하며 집에 방문하신 적이 있다. 성당에서만 하던 인사를 밖에서 들어서인지 그냥 ‘네, 안녕하세요’하고 대답하며 얼버무렸다. 그때 그분이 웃으며 말씀하시길 “자매님도 평화를 빈다고 함께 인사하지 않으시면 제가 말한 평화는 이 집에 머물지 않고 다시 제게 돌아온대요. 괜찮으시겠어요?”라고 했다.


고맙다는 말도 비슷하지 않을까. 상대가 반응이 없다면 머쓱하긴 해도 그 말을 한 사람에게 다시 되돌아올 테니 그냥 표현하자고 스스로 다독이게 되는 이유다. 그 말을 하면 메아리처럼 다시 내게 돌아온다. 당신 덕분에 감사하다고. 그 감사할 일을 받은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가치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 주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오늘도 어느새 우울하거나 힘들다면 감사할 거리를 생각해 보자. 내가 오늘 살아야 할 가치를 새로 발견할지도 모르니. 꼭 감사를 감사하다고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때로는 '수고했어요', '고생했어', '덕분에 잘 먹었어요.', '좋았어요'와 같이 상대의 어떤 언행에 대한 짧은 반응도 고마움의 또 다른 표시일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쉽고 흔한 말이지만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꾸준히 할 수 없는 멋진 말이기도 하니까.

회사에서 한참 일하고 있을 텐데,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이 갑자기 문자를 보냈다. 요즘 홍삼 엑기스 만들기에 정성이 보통 아니기 때문이다.

"건조기 껐어요?"(언제부터인가 문자를 할 때는 그가 내게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네."(평소처럼 '응'할 수가 없어서 나도 경어를 썼다)

"네네.. 수고했어요^^"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문자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건조기 끄는 일이 뭐 그리 힘들다고 수고했다는 말까지 할까. 부탁한 사람도, 부탁받은 사람도 어떤 일이 익숙해지고 당연해지면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져 인사를 안 하기 쉽다는 말이 떠올랐다. 순간 내 작은 행동에 고마움을 표현한 남편의 말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고 자칫 귀찮은 기분이 들 수 있는 나를 위한 배려라고 느껴졌다.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잊기 쉬운, 당연하게 여기기 쉬운 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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