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리던 날과 달리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날씨, 게다가 주말이다. 다리가 아닌 팔의 장애지만 섣불리 나갈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남편이 종일 내 곁에서 보살펴 주는 날. 나는 용기를 냈고 함께 십여 분 남짓 걸리는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주말 산책이다.
날이 풀렸다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품도 크고 두툼한 외투를 입어도 지퍼를 채울 수가 없었다. 군데군데 찍찍이가 있지만 슬링과 보호대 착용 때문에 잘 붙일 수도 없고 설사 겨우 붙인다 해도 금방 떨어진다. 혼자 있을 때 잠시 외출하게 되면 그냥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는 답답하다며 그냥 놔두라고 했지만 이리저리 당겨 옷을 최대한 좁게 당기더니 결국 옷을 여며 주었다. 중간에 구멍처럼 벌어져서 볼썽사납긴 했지만 기어이 내게 최대한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내 오른팔이 불편하니 자연히 내 왼쪽으로 서서 혹여라도 아픈 팔이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덕분에 나는 어색한 걸음을 걸으며 뒤뚱거리게 된다. 하지만 엄마 눈치를 보며 차마 마음대로 걸어가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남편의 점검과 확인을 받아들인다.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고 다음번 횡단보도를 만나기까지 한참 걸어야 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갑작스러운 남편의 행동만큼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뇌리 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뭔가를 말하고 있는데 남편은 돌연 손을 들어 '잠시만!'하고 내 말을 끊었다. 웬만하면 상대방의 말을 방해하지 않는 남편이기에 나는 조금 놀라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말과 걸음을 동시에 멈추었다. 남편은 마침 근처에 있던 벤치를 가리키더니 나를 이끌었다.
"이리 와 봐. 넘어질 것 같으면 나를 붙잡고 왼발을 살짝 올려 봐 봐!"
"응? 아!"
내 발을 내려다보고 그제야 나는 남편의 의도를 알아챘다. 내 왼쪽 발을 보니 운동화 끈이 어느새 풀려 땅 먼지에 그슬리듯 더러워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최근 사고의 원인처럼 미끄러져 넘어질 수 있는 눈은 없었지만 자칫하면 풀린 끈에 걸려 또다시 넘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남편의 빠른 판단과 눈치로 나는 생각지도 못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거의 앉지 않는 길거리 벤치지만 쭈그려 앉을 남편의 불편함을 생각해 최대한 살짝 왼발을 올렸다. 남편은 이내 허리를 구부리고 말없이 내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 주는 게 아닌가. 부끄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순간이었다. 결혼한 지 23년이 지났지만 연애할 때, 아니 그때보다 더 떨리는 심정이었다. 나를 아직도 심쿵하게 하는 남자. 나도 모르는 실수와 어설픔을 늘 살피며 사랑을 주는 그가 있어 힘든 일이 반감되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기로 유명한 김창옥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특히 부부 사이에서 필요한 건 '예쁜 말', '존중하는 말', '예의 바른말'이라고 하셨다. 사람 사이에서 언어는 단순히 말뿐만 아니라 행동, 몸짓, 표정으로도 드러난다. 내게 남편의 이러한 행동은 내게 그 어떤 말보다 예쁘고 친절하고 존중이 담겨있었다.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