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여명을 느끼기에도 이른 시각. 어젯밤 잠든 시간을 떠올리면 평소 수면 양에서 부족한 잠을 잤다. 느닷없이 새벽에 깬다고 늘 바로 일어나 그날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뭔가 또렷해지는 감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을 갔다 오고 이른 시간이지만 갑상샘 약을 먹고 녹내장 약을 투여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주모송으로 아침기도를 올리고 잠시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내가 왜 깨었지?'
잠시 앞뒤 맥락을 생각해 보았다. 깨는 순간 뭐가 달랐나. 아, 꿈을 꾸고 있었다. 별 내용은 아니었다. 내용이 다 기억나는 건 않는다. 내가 도망가고 있었고 뒤쫓아온 누군가와 싸우다가 맞아서 이가 하나 부러진 듯했고 뭐를 잘못했는지 어디론가 잡혀가서 일을 하다가 잠이 깨었다. 마냥 무섭기보다는 허망했고, 억울하기보다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심정이었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책이라도 읽을까 생각할 때 활자를 보면 다시 졸릴 때가 있다. 너 대 시간 잔 것치고는 그리 졸리지 않았다. 이따가 졸리려나. 매일 미사를 펴고 복음을 하나 읽었다. '부활 이후 시몬 베드로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과 제자의 대화가 나온 말씀이었다. 세 번이나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고 증언하며 배신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당신은 떠나시지만 남아 있는 세상 사람들을 돌보아달라고, 희생해 달라는 부탁이다. 베드로는 당신을 배신했지만 세상에 남아 사랑을 전파해 달라는 무한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일기장을 펼쳤다. 감사 일기 쓰려는데 문득 지난 주말 첫째와 나눈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허리 통증이 심해져 결국 국군 수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 담담하게 전하는 아이의 목소리.
'그렇네. 오늘 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는 날이구나.'
국가의 부름을 받고 갔으니 아파도 국가가 도와주리라 믿는 것과는 별개로 아이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 곁에 가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작은 응원이라고 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이가 성인이어도, 아무리 사소한 고비를 넘을지라도 그곳에 함께 있어주고 싶은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보호자가 필요 없는 나이가 되어도 저 멀리 강 건너에서라도 손을 흔들어주고 싶은 심정은 왜 이리 간절한가. 시술 부위는 척추인데 보호자 없이 화장실을 갈 수나 있을까, 진통제로 통증을 견딜 수 있을까. 아무래도 불편한 부분이 있을 텐데….
얼마 전에 본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도 생각났다. '엄마의 촉은 무시 못 한다'는, 이웃이나 친구, 친척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어둠의 기운, 불안함, 위기에 대한 감각. 어디서, 무슨 연유로 오는 감각인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신비함이지만 부모가 되고 보니 이해가 가는 듯도 하다. 모유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끊기는데 모성애는 호르몬과 상관없이 흐르는 것일까.
감사 리스트에 단골로 쓰는 항목 뒤에 짧은 감사와 소망의 기도를 적었다.
'오늘, 아이와 함께 할 수 없으니 주님, 요한의 수호천사를 보내시어 혹시 모를 불안이 있다면 잠재워주세요.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촉(觸)은 '닿다, 느끼다, 감각하다, 만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보이지 않지만 보는 감각이 되고 만지지 못하지만 가서 만나는 느낌이 되어 아이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족한 엄마의 사랑이 되어 약하지만 질긴 보호막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