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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반복하는 인간이기에

by 애니마리아

주일 미사에 간다. 안드레아와 함께. 가톨릭의 성당은 지역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바티칸의 전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을 중시하기에 다소 보수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통일된 전례와 성가, 의식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가끔 성지순례 삼아 다른 곳의 성당을 방문하여 미사도 드리기도 하는데 성당마다 조금씩 다른 분위기나 문화를 목격하기도 한다. 지난번 간 종로 성당의 '성가 미사'가 한 예이다.


몇 년 전부터 주임 신부님(대개 5년 주기로 본당 발령을 받아 오시고 가신다)께서는 사 전에 그날의 말씀 카드를 준비하셨다. 미사를 드리러 성전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성수(聖水)로 십자가 성호를 긋고 나면 말씀 카드가 놓인 선반이 보인다. 그곳에서 선별된 그날의 말씀을 한 장씩 자유롭게 가져가서 미사 중에 함께 낭독한다.


처음에는 '매일 미사'도 늘 가지고 다니고 어차피 독서 때 읽는데 따로 카드까지 챙겨야 하나. 괜히 쓰레기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면 그게 더 낭비일 것 같기도 해서 챙겨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핑계와 게으름이 정말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성경 구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태복음 13:3-9, 18-23)도 함께. 씨앗은 말씀인데, 듣는 사람에 따라 씨앗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떨어지고 깊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과는 천차만별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단지 기독교의 복음에만 국한되는 비유가 아닐 수도 있다. 아무리 좋은 조언, 지혜를 들어도 듣자마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조금 더 오래 머물러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들을 때 감격하고 탄성을 지르지만 하루도 못 가서 잊는다면 말이다. 실천해 보려 해도 유혹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끈기와 유혹을 물리치는 정도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다르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정성스러운 말씀 카드를 챙겨 오기로 했다. 신부님이 고르신 말씀을 누군가 정성스럽게 작성하고 오려서 나와 같은 어리석은 신자를 위해 준비한 것이기에. 그것만으로 충실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내게 던져진 씨를 짓밟지는 말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작은 제스처의 변화를 시작으로 내게 거저 주어진 사랑을 가꾸고 싶었다. 그렇게 첫 주는 말씀 씨앗이 길가가 아닌 돌밭에 떨어져 며칠 살아남았다.


두 번째 주가 되었다. 지난주의 말씀 카드가 미사포 주머니에 구겨져 있었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기억해야지, 잘 보관해야지, 어떻게든 활용해야지'하고 마음먹었던 게 생각났지만 안 하던 행동인지 이내 잊었던 것이다. 잊음과 동시에 좋은 말씀 씨앗은 뿌리를 내지 못하고 말라버렸다.


그다음 주에는 말씀 카드를 분실했다. 쓰레기가 아닌데 쓰레기처럼 소홀히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돌밭에서 다시 길가로 후퇴한 나의 얄팍한 결심, 믿음이 허망했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에 밀리면 그냥 그걸로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던 대로 살아'와 같은 자기 비하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한 주가 또 지났다. 이번에는 말씀 카드를 들고 들어가면서 어떻게 하면 오래 간직할 수 있을까. 실천 여부와 상관없이 어떻게 하면 최대한 기억할 수 있을까를 잠시 고민했다. 물론 강론 때 신부님은 늘 그러셨듯 두 번 낭독을 권하실 테고 좋은 말씀을 해 주시겠지만 미사 후 성당을 나서면서 알코올처럼 휘발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숙제처럼 억지로 하지 않고 꾸준히 묵상하고 싶었다.


우선 복음의 말씀 중에 유난히 내게 깊이 다가오는 구절 혹은 단어를 택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필리피 2,8)



가톨릭 신자로서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들이 있다. 사랑과 믿음도 있지만 겸손도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한다. 늘 반복되고 늘 회자되는 말,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식욕, 물욕 못지않게 명예욕은 정말 버리기 힘든 욕망이다. 꼭 경제적인 이유나 권력 지향적인 목표가 없더라도 잘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것도 넓게 보면 겸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잘한다는 것은 비교를 전제로 하지 않나. 내가 뭔가를 잘한다는 것은 대개 다른 누군가보다 잘하는 것을 의식해서 나온 감정이기에 결국 돋보이고 싶은 본연의 감정이니 말이다. 아무리 욕심을 버리고 과욕에서 벗어나려 해도 어느새 겸손에서 벗어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신으로서 사람은 얼마나 하등 한 존재로 보였겠는가. 그런데도 우리의 수준에 맞추어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오셨다는 것은 믿기 힘들 정도로 이타적인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자세로 겸손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인류에 대한, 생명에 대한 사랑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내용일 수도 있지만 굳이 반복하고 기록하고 또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알아도 다 실천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들어도 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아도 죄를 짓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천국으로 가는 보증수표가 아니다. 믿는다고 무조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 창녀 등 죄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지 않는가. 세례를 받고 교리를 잘 알고 있더라도 그에 안주하면 일반인보다 더 나을 게 없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내로남불 하는 오만한 신자보다 나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선의 마음으로 반성하고 실천하는 행동이다. 단 한 번의 시도가 만 번의 결심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가.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신부님의 강론 초반에 인용한 말씀이 다시 떠오른다.


"어느 날 왕이 스님에게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대 얼굴은 마치 돼지처럼 생겼구려."

"폐하의 얼굴은 부처님과 같습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않았다는 생각에 왕은 머쓱해져서 왜 그렇게 말하냐고 되묻습니다.

"중생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어 폐하가 부처처럼 보이고 폐하 마음속에 돼지가 있으니 소승이 돼지처럼 보이는 게 아닐지요."

/고려 시대 고종과 혜심 스님의 고사 중에서



신부님은 이 불교의 내면에 대한 가르침처럼, 기독교의 겸손의 참다운 자세처럼 우리 생각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니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는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고 덧붙이셨다.


자신의 생각을 무엇으로 채우려 노력해야겠는가. 세상이 이러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따르기만 해야 할까. 때로는 외롭고 고지식해 보일지라도 내 생각의 주인으로서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살고 싶다.


이날 받은 성지 가지(주님수난성지주일이었기에)를 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외롭지만 행복한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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