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종종 깨닫는다. 가까운 것도 잘 안 보이고 먼 곳도 잘 안 보인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근시였다.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먼 곳, 조금 먼 곳조차 보이지 않으니 원시라 할 수 있을까. 원시는 가까운 곳은 잘 보인다는 게 전제로 들어가 있으니 내게 딱 맞는 이름은 아닌 듯싶다. 근시와 원시, 둘 다일 수도 있고 급격한 노안 현상일 수도 있다. 평생 안경을 써 왔지만 앞으로 살아온 날 이상으로 써야 하며, 써도 제대로 볼 수 없음에 한숨이 나오려다 내 눈치를 본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 꼭 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박쥐는 음파 등으로 반향 전위(소리 나 초음파를 쏘아서 주변 사물 파악)를 하니까. 놀랍게도 돌고래는 시력이 좋지만 물속에서 한계가 있기에 역시 음파로 주변을 파악한다고 한다. 최근 읽고 있는 원서 <PROJECT HAIL MARY>(BY ANDY WEIR, 2021)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Sound?" I say. "Do you 'see' with sound?"
It would make sense. Humans use electromagnetic waves to understand our three-dimensional environment. So why couldn't a different species use sound waves? Same principle-and we even have it on Earth. Bats and dolphins use echolocation to "see" with sound.
p.189/Project Mail Mary
서로 다른 시스템으로 서로의 존재를 '보는' 행위를 지적이면서도 유쾌한 유머로 그린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함께 읽고 있는 한강의 작품 <희랍어 시간>에서는 시력을 잃은 한 남자의 수용, 승화와 벅찬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한 편의 시처럼.
" 동이 트려면 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겠지,
그때까지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겠지.
이제 스탠드를 끄면 어둠이 찾아오겠지,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이 거의 다르지 않은, 먹보다 진한 내 눈의 밤이.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 중략...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83~84쪽/희랍어 시간
나이가 들면 대부분 감각 퇴화의 과정을 겪지만 시력은 소중한 축복 이상이다. 눈먼 사람의 시력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기적이 복음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단순히 신체의 장애를 고치신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까지 치유하지 않았나 싶다. 고대에는 장애도 죄 때문이라는 편견이 있었다고 하니 태어날 때부터 지워진 무게는 그 어떤 중력보다도 강력했을 것이다.
녹내장을 진단받은 이후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며 약으로 관리 중이다. 인공눈물, 치료 약, 눈 세척, 염증 약을 돌려가며 관리를 하고 있지만 눈은 가렵고 따갑다. 단순히 보고 안 보고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 그 이상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헬렌 켈러의 노력이 존경스럽다.
돌고래의 음파 능력이 부럽다.
나도 마음의 눈으로 보는 초능력이 있다면
마음을 다스리는 제3의 눈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