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크게 아픈 적이 별로 없다.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하는 사람으로서 병원을 제2의 집처럼 드나드는 나로서는 어찌 보면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갑자기 전화해서 허리가 너무 아프다며 수업조차 못 듣겠다며 조퇴를 하는 상황이 유난히 걱정되었다. 최근 간헐적으로 허리와 목이 불편하다고 하여 물리치료를 받고 있어서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아파도 잘 말을 안 해서 더 무심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스스로 아프다고 하면 증세가 꽤 오래되었거나 심각할 가능성이 있었다. 응급조치로 학교 근처에서 치료를 받고 온 아이는 많이 아팠다고 했다. 주사를 무려 7대나 맞았다며.
남편과 상의해서 다음날 원래 다니던 집 근처 정형외과에 가서 다시 진료를 받기로 했다. 마침 근로자의 날이었고 남편은 일을 쉴 수 있어서 함께 아이를 챙기기로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게 MRI를 찍기로 했고 엑스레이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문제가 드러났다. 진단서에는 '아래허리긴장, 요추부'라고 간단히 적혔지만 주치의에 따르면 아이의 척추뼈 두 군데가 비정상적으로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시술을 하기로 했다. 입원이 결정되었고 여러 검사와 약물 조치, 시술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취를 했음에도 구멍을 뚫어 시술이 이루어져 꽤 아팠다고 한다.
진료와 입원, 시술 등의 과정으로 우리 부부가 아이와 함께 대기하는 시간도 꽤 길었다. 한 번은 아이가 남편에게 물었다.
"아빠는 오늘 쉬는데, 여기 병원 선생님들은 다 일하시네. 쉬지도 못하고?"
"맞아. 하지만 너처럼 급하게 아픈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이분들이 일하셔서 조금이라도 빨리 너를 치료할 수 있잖아. 감사한 일이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필수직 근로자'란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얼마 전 역대급 화재로 역대급 위험과 피로를 상대하며 일하신 소방관들, 급한 환자가 기댈 수 있는 병원과 의료진들, 버스와 지하철 등 시민을 위한 운송 근로자들의 삶은 단순한 일, 그 이상의 것이기에.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는 미안하지만, 염치없지만 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숙명의 근로자들.
근로자의 날.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하여 정한 날'(표준국어 대사전)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일하는 사람은 모두 쉬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악덕 고용주의 횡포가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분야에 따라서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손해나 피해, 고통이 커지는 현실 상황이 있어서다. 법정 공휴일로 붉은색으로 표기되지 못하는 것도 이런 맥락의 연장이지 않을까. 필요하지만 다 지킬 수 없고 모두 누릴 수 없지만 그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하는 날이기에.
우리나라는 1958년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지정했다. '노동자' 어휘가 주는 사회주의적, 정치적 뉘앙스라는 인식에 좀 더 순화되고 중립적인 '근로자'를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1980년이 이후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근로자'는 정부가 만든 통제적 표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노동자'는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단결하는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여 다시 원래 명칭인 노동절(International Wokers' Day)로 부르자는 주장이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에 상관없이 근로는 법적, 제도적 분야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단어이니 만큼 성실과 중립의 이미지가 있어 보인다.
고귀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냐고,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모든 일은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어 우열을 가리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따라 기회가 되면 미안해하고 감사해야 할 직업은 있는 것 같다. 경제적 논리로는 평등이라는 이상을 이룰 수도 없고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직접적, 간접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으로 혜택을 누리기도 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도 한다. 휴일에도, 늦은 밤에도 물건을 살 수 있는 우리나라. 이미 습관화되어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다. 사회적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고 성실한 근로자가 많은 사회에 살고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해 본다.
최근 드라마 '중증외상 센터'를 보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적자만 내며 심지어 오해와 미움을 받는 일을 왜 하냐는 신입 의사를 향해 주인공 '백강혁 의사'는 말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아버지를 거부했던 병원, 결국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며 결심했어. 나는 절대 내 앞의 환자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중략)... 네 잘못이 아니야. 아직 너만의 이유를 찾지 못했을 뿐이야. 너도 너만의 이유를 찾아.'
현실적이지 못한 캐릭터이지만 현실에 전혀 없지는 않다. 실제로 누군가를 모델로 삼은 소설, 드라마라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사람을 의인, 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터이다. 존경스럽지만 감히 따르지 못하고 미안하지만 결국 이러한 의인에게 의지하는 보통 사람, 나의 마음이다.
올해 이미 시간이 꽤 지났지만 감사에는 정해진 때가 없다.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다이어트 결심처럼 오래가지 못하더라도, 또 잊을지라도, 단 한 번의 실천이 되더라도 시작해야지. 버스를 타면 좀 더 큰 소리로 인사해야지. 부끄럽지만 어색한 미소와 함께. 병원에 가면 만나는 모든 직원을 향해 감사하리라. 저 멀리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는 응급차나 소방차를 보면 시끄럽다며 짜증 내지 않으리라. 미약하지만 화살기도라도 짧게 드리리라.
'오늘도 감사합니다, 미안하지만 수고하시길요. 힘드시겠지만 그 와중에 행복한 순간, 웃을 수 있기를 바라요. 누군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힘을 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