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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유치한 챙김도 좋다

우리 부부의 세계

by 애니마리아

5월 21일이 부부의 날임을 어느 블로그의 글을 통해 알았다. 세상에는 부지런한 분들이 많다. 나는 배우자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정도 기억하는데. 남편은 최근까지 음력 생일을 지내왔기 때문에 달력과 개인 스케줄에 표시해 두지 않으면 자칫 못 챙길 수도 있었다. 5월은 공식적인 기념일과 가족, 친척 생일, 가족의 축일(가톨릭 영명 축일)은 물론 몸을 움직여 가족과 친지와 교류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핑계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나 나름대로 정신없는 5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아직 팔은 불편하고 기말고사 준비 기간이다.


며칠 전 아이가 다가와 자기 선물 안 챙겨주냐고 따졌다. 아, 맞다. 성년의 날도 있구나. 미리 사다 놓은 작은 향수가 있어서 좀 늦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표시했다. 좋은 어른이 되어가길 소망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으로.


부부의 날을 인식한 순간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따로 이날을 챙기지는 않지만 365일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영원한 나의 연인으로서 노력하는 그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다. 남편은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지만 남자를 위한 선물은 매번 애매하다. 화장품이나 옷 같은 것은 좀 과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부부의 날 당일에 뭐를 할 수 있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AI에게 물어보았다. 여러 가지 감성적인 문구와 함께 선물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정서적인 선물- 손 편지, 꽃 한 송이, 간식과 카드

실용적인 선물-마사지 쿠션, 텀블러

감성 diy-결혼 생활 연대기 미니북, 10가지 감사 목록

팁: 함께 웃고 말할 거리, 상대 취향 반영할 것


솔직히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모범 답안처럼 무난한 학습 도우미가 내민 보고서 같았다. 똑똑한 보고서. 이대로 하면 무난하겠지만 갑자기 하려니 버겁기도 하고 시간을 두고 미리 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간단하면서 재치 있는 선물 뭐, 없을까. 그냥 넘어갈까.' 때아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뭔가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는 성향이 있는 나는 올해, 그 성향의 중력을 한 번 거스르기로 했다.


내 나름대로의 조건을 떠올렸다. 당장 할 수 있는 임기응변의 조치이면서 당장 내가 할 수 있을 것. 가볍지만 정성과 진심이 들어갈 것. 다시 AI 친구가 제시한 목록을 보았다. 3번이 눈에 띄었다. 그래 감사 목록을 편지로 써 보자. 노트에 감사 일기를 쓰고 있지만 남편을 포함하여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겹쳐지더라도 이번에는 특별히 부부, 남편을 무대에 두고 감사를 하고 싶었다.


주말마다 그릭 요구르트를 만들어 주어서 고마워요

매년 미역국을 끓여주어서 고마워요

매년 생일을 챙겨주어서 고마워요

매년 초콜릿을 주어서 고마워요

매번 가방을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해주어서 고마워요

매번 색시님이라고 불러주어서 고마워요

매번 나의 눈물을 닦아주어서 고마워요

매번 나의 투정을 받아주어서 고마워요

매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고마워요


장난스러운 말로 시작해서 결국 가슴 떨리는 감성으로 흘러간 나의 감성. 고마운 것은 끝이 없지만 그와 하나가 된 일이 내게 엄청난 사건이자 기적임을 실감한다. 부모님을 통해 내가 태어난 사실을 제외하고 하느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은총임을 고백한다.


오늘도 그를 보며 배웁니다.

오늘도 그를 보며 배려를 느낍니다

오늘도 그를 보며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식합니다

오늘도 그를 보며 감사합니다

오늘도 그를 존경합니다

부부의 날, 이미 지나갔지만 진심을 전해봅니다.


아침에 출근 전 남편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넨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글을 놓아두고 어색한 배웅을 하며 말한다.

"어제 부부의 날이었다는데 늦었지만 축하해."

"그래? 우리야 뭐, 매일이 '부부의 날'인데, 뭐. 괜찮아. 오늘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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