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명이 죽음 사이를 뚫고

by 애니마리아


올해 3월 의성을 시작으로 경북의 드넓은 지역을 집어삼켰던 화마. 나의 시댁이자 남편, 안드레아의 고향 청송은 그 한가운데서 아픔을 고스란히 겪었던 곳이자 아이들의 조부모님의 터전이기도 하다. 아직도 남편이 새벽같이 떠났던 날이 기억에 생생하다. 길을 막아 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무작정 길을 나섰다. 막상 터널에 이르러서는 화재로 전기도 없이 껌껌한 그곳을 지날 때 그가 느꼈던 공포. 단순히 불과 연기로 뒤덮인 상황뿐만 아니라 통신이 아예 두절되어 연락이 되지 않을 때의 타들어가는 마음. 그곳에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해 들었을 때의 서늘함을 기억한다.



안전을 위해 어디론가 가야 하지만 갈 곳이 없어 우왕좌왕하며 달걀로 바위 치기처럼 물바가지로 여기저기 뿌리던 찰나 아들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머금으셨다는 어머니의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다리도 불편하신 아버님의 불안과 버거운 눈빛을 어찌 바라볼 수 있을까.



5월이 되었다. 어버이날이 지난 어느 날 우리 식구와 시댁 사형제는 일제히 청송으로 향했다. 마침 어머님 생신도 다가왔고 올해 큰일을 치르신 부모님을 찾아뵙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시댁 부모님의 집만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주변에는 복불복처럼 종잡을 수 없이 지나간 화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결혼 후 수없이 지나다닌 청송으로 가는 길이 올해는 색다르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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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시댁이 있는 청운리 근처이다. 이 풍경 사진의 풍경이 어떠하게 보일까. 상당 부분이 진한 갈색으로 변해있는 나무들이 아름다운 낙엽송처럼 보이는가. 단풍이라도 든 것처럼 풍성한 나무숲처럼 보이는가. 만약 사진을 찍은 시기가 가을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 것이다. 가을이라면 바로 도로 옆에 몰려 새로 자란 잡초 같은 풀들은 왜 한여름의 녹음처럼 푸른색인가.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않은 광경이다. 죽음을 몰고 온 화마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아직 초여름이 오기도 전인 봄, 청송의 풍경이다. 주로 산등성이를 타고 불이 지나간 자리는 새카맣고 뼈조차 타버린 듯 앙상히 죽어 있는 나무 형상의 재가 서 있는 듯하다. 바람을 타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가며 태운 자국은 산 채로 죽은 나무가 그대로 화석이 된 듯 진한 갈색을 띠고 있다. 오묘한 가을빛을 띠고 있는 잎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줄기는 석탄처럼 굳어버린 지 오래다.



검게 그을린 나무 사이사이로 비좁은 틈을 타고 자란 새싹과 잡초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평소의 잡초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지겹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양가도 없이 거의 타버린 자리 사이로 그동안 내린 비를 머금고 자란 풀들이 말라버린 나무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잡초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우리 대신 아파하며 죽어버린 나무들을 위로해 주어서 감사하다고.'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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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옆에서 잎을 피운 풀들과 작은 나무들 너머로 심각하게 타 버린 산등성이 위의 나무들이 마치 다 타버린 머리카락처럼 을씨년스럽다. 일렬로 줄을 서서 스스로 장례식을 치르는 나무들의 행렬처럼 보이기도 하다. 어떤 산은 회복하려면 5년,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던데 과연 고향의 이 산들이 제대로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화재가 난 지역도 불이 난 정도와 흉터는 다 다르다. 나뭇잎 하나 남지 않은 검은 막대기만 남은 곳이 있는가 하면 마치 가을 낙엽송처럼 묘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죽은 나무 무리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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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산과 산이 이어지는 곳은 마치 어두움 속에서 빛이 서서히 지나가며 밝아지듯 푸른 잎이 썩을 듯 흉측한 상처를 껴안고 있다. 새순이 검은 흙을 가려주고 새로 난 푸른 잎이 검붉은 잎에 손을 내민다.



새마을 운동을 했던 1970년대처럼 나무를 심는 사람도 없고 재원도 부족한 상황이다. 부족한 예산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동안 자연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스스로를 보듬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모성 가득한 자연을, 환경을 끌어안기는커녕 충분히 도움을 주지도 못 하니 이 또한 어이없는 아이러니이다.



조금씩 더디게 하지만 찬란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다시 살아가는 자연, 그 모습을 보며 무기력하고 무심했던 인간도 치유의 힘을 얻는다. 그렇게 생명은 화마의 생채기 사이를 뚫고 나온다. 불행한 죽음에서 삶의 힘을 내는 풀과 나무들이 사람들에게 어서 정신 차리고 다시 힘차게 살아가라고 외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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