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에서 철학을 만나기도

by 애니마리아


6월 8일은 성령강림 대축일(Pentecost)이었다. 기독교에서 성령 강림절이라고도 하는 이날은 부활절 뒤 7번째 일요일에 해당하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약 50일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시 오신, 강림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이날,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였고 그들 사이에 불의 혀 같은 성령이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지역도, 언어도 다르지만 여러 언어로 알아들은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도행전 2,11-11)



그날의 복음은 요한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과 함께 인간이 번뇌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아갈 통찰을 접하는 것과 같았다. 물론 매년 반복되는 말씀의 실현은 각자의 실천에 달려 있다. 아는 것과 행동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 19-23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음에도 다시 세상에 내려와 평화를 주신 분. 그분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지만 고된 삶을 헤쳐나가는 데에 큰 힘이 되는 선물이다.



매년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면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있다. 바로 성령 칠은(성령의 7가지 은총)이다. 미사 전, 혹은 미사 중에 7가지 은총이 적힌 카드를 뽑는다. 지혜, 통찰, 의견, 지식, 용기, 효경, 경외가 적힌 카드이다. 최근 몇 년간 나는 경외(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러러보는 마음)를 뽑았었다.



올해 뽑은 카드는 '지혜'였다. 세례를 받은 이후 처음으로 뽑은 은사(恩賜)이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는 좀 다르다.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표준국어 대사전)'이라는 뜻과 어떤 점이 다를까. 신앙서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하느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은사'이다. 혼란스럽고 빠른 세상에서 선한 그분의 시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론 중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받는 은사는 가장 부족한 자질이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라고. 짧은 지식과 좁은 시야로 선택에 기로에서 망설이는 내게 있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는 무엇보다도 내게 나침반이 되어주지 않을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가운데 그것이 또 하나는 끌어당김을 일으켰을까. 곧 참여하게 될 북클럽에서 권한 첫 책이 <철학의 힘>(김형철, 2024년, 서삼독)이다. 프롤로그를 읽다가 쓸모없는 학문으로 치부당하는 철학의 쓸모를 다룬 부분이 눈에 띄었다.



실용을 앞세우는 분야일수록 이론들은 정신없이 쏟아지고 다음 날이면 대부분 폐기 처분된다. 그러나 철학은 2500년 전 스승들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

14쪽/철학의 힘 중에서



철학의 지혜는 종교에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와는 또 다를 것이다. 생각하는 힘을 주고 잘 살아가기 위한 도움에 철학에서 배울 점은 분명 많을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철학적 지혜가 있기에 아동서 <강아지똥>(1996)이 또 하나의 고전으로서 강한 울림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논리와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아는 지혜는 중요하다. 이와 더불어 세상을 선(善) 한 신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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