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리 성지)
"아름다운 일, 좋은 일로 채워진 삶으로 채워진 인생이 얼마나 될까요? 저의 인생에도 이런저런 굴곡이 찾아오더군요. 신학생 때 축구를 하다가 발을 심하게 다쳐서 한참 누운 채로 공부를 해야 했고요. 로마로 유학을 갈 때 코로나도 함께 오더라고요. 그 덕에 먼 타향에서도 좁은 공간에 저를 가두고 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도 굴곡진 일이 있으셨겠지요. 아니, 지금도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은 여러분의 잘못일 수도, 타인의 잘못에서 왔을 수도, 혹은 환경적인 요소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너무 버겁고 힘들다면 주님께 함께 해달라고 청하는 건 어떨까요? 저희의 짐을 기꺼이 들어주실 테니까요. 힘들지만 삶 속에서 기쁨과 감사를 잊지 않은 그분들처럼 여러분도 오늘 성지를 돌면서 행복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올해 네 번째 성지 순례의 주인공은 '공세리 성지'이다.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공세리에 있는 곳이다. 하마터면 이곳을 가지 못할 뻔했다. 성지를 가기로 한 날 남편 안드레아 고향 친구의 부친 상 소식이 들려와 그날 청송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평소 안드레아는 '친구의 좋은 일은 못 가더라도 슬프고 힘든 일이 있다면 가서 힘이 되어 주도록 노력하자'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는 터라 나는 원래 계획한 여정을 취소하는 걸 당연히 받아들였다.
안드레아는 충분히 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고향 시골로 가기 전에 잠시라도 성지에 들러 미사를 드리고 가자고 했다. 그의 다소 난감한 듯한 표정과 배려 섞인 말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닥친 일 때문에 만만치 않은 여정이 예상되었다.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 성당에 가야 했고 주변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바로 안드레아의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시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일치기 코스는 그렇게 일박 이일 여정이 되었다.
공세리 성지는 한국 천주교 박해 시기 순교하신 32위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보통의 성지처럼 이곳도 성당과 십자가의 길, 성모상, 기도 동산과 같은 곳이 산속에 어우러져 있다. 조선 후기 특히 병인박해(1866) 전후로 많은 신자들이 이 지역으로 피난 와서 교우촌을 일궈가며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신자들은 당시 관군에 체포되어 끌려가거나 순교하였다. 성지 내에 있는 박물관에 이분들의 희생과 고난, 외국인 신부님의 노력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공세리 성당은 프랑스 선교사의 노력으로 1894년에 착공되어 1920년대 완공된 고딕 양식의 벽돌 건축물로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 성당 중 하나이며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움과 고딕 양식의 예술미가 탁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종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가 되기도 할 정도라 하니 비신자들도 이곳을 역사 탐방지이자 여행지로 잠시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태극기 휘날리며', '사랑과 야망', '에덴의 동쪽', '청담동 앨리스' 등이 촬영된 장소다. 가톨릭에서 중요한 성지이면서 충남 지정문화재 144호이며 그곳에 있는 거목들이 반겨주는 기운이 남달랐다. 알고 보니 350년이 넘는 국가 보호수가 3그루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주변은 소박하지만 열정이 느껴지고 고딕 양식이라는 서양의 분위기가 나기도 하지만 자연과 어울림이 좋은 기운을 풍기기도 한다.
시간이 부족해 다 돌아보지 못했지만 가을에 다시 오게 된다면 차분히 묵상하며 거닐고 싶다. 안드레아와 함께.
시댁에 가면 늘 어머님의 텃밭이 기다리고 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품으며 열심히 자라고 있는 가지의 생명력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시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진한 보라색의 기적이다. 땀 흘리며 평생 살아오신 그분들의 삶이 존경스럽다. 철없는 도시녀에게 깨달음을 준 것은 비단 나의 신앙뿐만은 아니다. 그분들의 삶과 태도를 통해 부모, 자녀, 타인에 대한 태도, 인생에 대한 성실함을 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배우고 있다.
이날 미사 중 들었던 신부님의 강론을 정리하다 보니 김종원 작가님의 블로그 글 한 구절이 떠오른다. 힘겨움 속에서도 자존감을 위한 묵상과 치유의 말 가운데 신부님의 말씀과 결이 비슷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어제의 하루를 오늘도 반복할 뿐, 과정은 나의 것이지만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중략)
질투와 시기는 무지한 지성에서 오는 수준 낮은 감정이니, 오직 경탄하며 존경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라.
인생이 고통스럽다면 잘 살고 있는 거다. 인생은 원래 고통을 다 지운 상태로 사는 게 아니라, 고통이라는 모대 위에서 춤추며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작가 김종원의 글 중에서
고통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는 없다. 춤사위든 노래든 기도든 조금이라도 웃어보자. 고통을 줄일 수는 있다. 고통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더라도 나의 친구 기쁨과 감사를 초대할 수는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