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학위를 마치며

by 애니마리아




최선을 다해 '나'를 찾지 않으면 결국 죽음 앞에서 진짜 '나'로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진짜 '나'를 찾는 순간부터 '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돈키호테처럼.

103쪽/<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고명환, 중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단연코 영어였다. 고 3, 1학기 때까지만 해도 전공으로 영어를 택하리라는 결심은 여전했다. 하지만 수능일이 다가오면서(당시에는 수시도 없었고 단 한 번의 수능만 치를 수 있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밀려왔고 서울 및 경기권 학교는 자연히 후보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집안 형편에 재수는 불가하니 안정적이고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를 선택했다. 전공은 영문과가 아닌 중어중문학과. 한 번에 합격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막상 중어중문학과를 들어가니 새로운 언어가 재미있었다. 입학 두 달 전에 중국어 학원에 다녀 발음기호인 한어병음(漢語倂音)을 익히고 간단한 회화를 연습했다. 표의문자라 외울 게 많아 힘들었지만 대신 문법은 영어에 비해 덜 복잡했고 간체자를 사용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중국어 연극부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고 중국어 웅변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학교 안에서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었다.



언젠가 김미경 강사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은 타고난 본능에 따라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로 돌아가 그것을 추구하게 되어있다'라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꽤 일찍부터 내 본능의 부메랑을 되돌려 날리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들어간 최초의 동아리는 '굿모닝 팝스'라는 영어 회화 모임이었다. 2학년 때는 교직이 아닌 부전공으로 영어를 선택해서 공부하기도 했다. 3학년 때는 유학생 출신 선배들의 회화 모임에서 활동했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수업에서 영어 통역을 간간이 하기도 했다. 4학년 때는 전공 수업 외에 토익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다.



졸업 후 결혼 전까지 외국 물류 회사에 다니며 중국어를 가끔 쓰기도 했지만 실제 업무는 영어를 더 많이 쓰는 환경이었다. 아이를 낳는 중간에 경력 단절이 되면서 공부를 시작했던 분야 역시 영어였다. 테솔 TESOL 과정 및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자격증을 공부하며 영어 학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중간에 안정적인 일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에 나는 다시 한번 다른 길을 꿈꾸며 전혀 다른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다. 행정법, 국사, 국어, 행정학, 영어를 보는 9급 공무원 시험에 3년 넘게 매달렸다. 영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은 아무리 공부해도 점수가 오르지 않았고 건강을 크게 해친 후에야 그 길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내 생애 가장 큰 실패였다. 우선 노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건강과 시간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희생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단지 '안정'이라는 키워드 때문에 억지로 할 경우 결과가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인식했다.



가계를 돕기 위해, 뭔가라도 하려고 다시 어학원에서 일했지만 마음 한편으로 공허함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았다. 물론 영어를 가르치며 공부하는 삶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영어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좋아하지 않거나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는 아이도 있다.



영리를 추구하는 학원의 방침에 따라 어린 학생을 어르고 달래며 억지로 영어 공부를 시키는 삶을 이어갈수록 나는 사설 교육자로서도 자격이 미달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나도 싫어하는 과목 때문에 억지로 공부했다가 고생하고 시간을 낭비했는데 미래의 주역들에게 강요하는 일이 보람 있다고 여길 수 없었다.



아마 그즈음인 것 같다. 영어를 좀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우연히 번역에 대한 에세이를 읽게 되었고 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나는 좀 더 공부해서 번역가로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당장은 일을 그만둘 수 없으니 번역 학원을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학원 일을 병행하다가 몸이 아프면 그만두는 일이 반복되었다. 체력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고 면역력도 떨어졌는지 코로나가 창궐하자 초기에 바로 걸렸다.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며 관련 번역 수업을 들으며 투병생활을 지속했지만 내가 원하는 번역가의 길은 좁다 못해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단순히 기계처럼 번역만 하는 기술번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돈은 잘 못 벌 지언정 내 이름으로 남기는 번역서를 세상에 남기고 싶었다. 출판 번역가의 길. 이미 기성 작가를 보유한 출판사에 문을 두드리기엔 실력도, 연줄도 없었고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신생아가 된 기분으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밟아가기로 했다. 내 나이에 이미 한 분야의 전문가나 지도자가 되어 있거나 조기 은퇴를 준비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환경을 탓하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번역을 공부한 사람은 안다. 해당 외국어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도착어, 바로 한국어 실력이다. 한국의 독자를 위해 원문을 살리되 가독성과 흥미를 돋우는 준 작가가 되어야 했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국어를 잘해야 했고 독서도 많이 해야 했으며 단순한 회화가 아닌 깊은 학문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출중한 영어 수준이 절실했다.



인스타그램을 개설하고 100일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책, 국내서, 신문 등 번역 실력을 키울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매달렸다. 100일이 1000일이 되고 2000일 가까이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아직 나의 꿈이 진행형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평생 공부하는 번역가가 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4년 전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김혜경, 2022)라는 책을 접했다.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면서 무려 8년 가까이 방송대 과정을 밟으며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은 분이었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를 마스터하며 출판 번역 일도 하시는 분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미리 준비하셨기에 은퇴 후에도 배움과 번역 일을 꾸준히 하시는 분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실행력이 부러웠고 이리저리 재며 차일피일 공부를 미뤄온 게 부끄러웠다. 그분의 책을 읽고 강한 동기를 얻었다.



학원 용이 아닌 진짜 영어 실력을 쌓기로 결심했다. 전공을 제대로 선택해서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교 수준을 신경 쓰는 건 어리석게 느껴졌다. 10년 전에 후회했듯이 10년 후에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시간과 돈이 있다고 해도 더 악화된 건강 상태와 노화로 시도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간절히 원하면 전 우주가 도와준다고 했던가. 2022년 여름학기 방송대 영문과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책을 골라 번역도 시작했다. 누가 제대로 봐주지 않았기에 어설픈 번역서로 전자책을 내었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2023년 우연히 SNS에 도서관의 에세이 수업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읽고 글을 쓰는 것에 두려움이 있던 내게 정말 필요한 수업이었다. 감사하게도 함께 듣는 동기와 선생님이 정말 열정적이고 좋은 분들이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책을 접하고 읽었으며 꾸준히 글을 쓰는 연습을 했다. 서평, 에세이, 필사, 단상, 감상 등 최대한 시간을 내어 글 쓰는 연습을 했고 관심사를 넓혀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도 들였다. 에세이 수업이 끝나고도 유사한 문학수업이나 독서, 글쓰기 수업이 있으면 신청해서 공부와 병행했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다.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사고나 가정사가 일어나기도 하고 아픈 곳이 생기거나 재발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 딸로서, 그리고 학생으로서 어느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빠져 힘든 적도 많다. 횟수는 줄었지만 이런 마음을 다스리기란 여전히 힘겹다. 수시로 찾아오는 배고픔처럼 지치지 않는다. 단, 과거와는 달리 최대한 감정의 쓰나미를 견디며 잘 이겨내기를, 혹은 현명하게 지나치기를 바라며 기다린다.



때로는 이렇다 할 방법이 없어서 꾸역꾸역 그날의 할 일, 과제를 해 나가기도 한다. 이게 될까. 실력으로는 AI가 더 나은데 거북이 같은 내가 이 일을 한다고 뭔가 이룰 수나 있나. 가장 무서운 건 이러한 자기 의심이었다. 나를 무시하고 허무해하고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책 읽기가 과제가 아닌 사랑하는 일이 되었고 양치하듯 글쓰기나 글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타인이나 AI와의 비교가 아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발전하기 위해 성장하는 하루하루가 감사했다. 이벤트처럼 몇 자 썼던 감사일기를 거의 매일 쓰게 되었고 나만의 루틴으로 고난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2024년 '해리포터 시리즈 7권'을 원서로 완독 했고 이후로도 여러 장르의 원서를 매일 읽고 있다. 굼벵이처럼 느릿느릿하지만 꾸준히.



2025년, 가뭄에 콩 나듯 좋은 번역 수업이 다시 눈에 띄었고 두 번째 역서를 내게 되었다. 생각보다 소화하고 공부해야 할 양이 많아 힘들었던 방송대 마지막 학기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며 내 목표를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괜찮다. 나는 꽤 변했다. 완벽한 변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다. 목표한 만큼 이루지 못했어도 나를 지나치게 미워하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 정말 작은 성취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조금이라도 성숙할 수 있었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며 감사를 통해 만족할 수 있었다. 노력하되 내 모든 것을 지나치게 쏟아붓지 않아서 내일 다시 일어서고 공부하며 일할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여전히 삶이 두렵고 힘들다. 미래가 불안하고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며 감사할 거리가 끊임없이 내게 주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희망을 느낀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나의 편견이 점점 깎이고 다듬어지며 열린 마음으로 깨달음으로 전환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프기만 한 어른이 되기 싫어서>(강인식)에서 희귀병으로 날마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학업을 이어가고 번역까지 해낸 박현묵 님의 책이 떠오른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그의 열정은 내 평생 기억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것을 더 공부하고 어떤 책을 번역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무엇을 하든 내게는 고난과 예기치 못한 풍파가 올 것이다. 풍파가 오면 다치고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내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안드레아가 있다. 같은 꿈을 가는 이들도 있고 잠시나마 나를 응원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 나의 하찮은 재능으로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계속 배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오늘도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불편한 감각이 올라온다. 책을 읽으려니 눈은 따갑고 흐리며 손목은 아프다. 수술한 부위가 욱신거리며 부러진 뼈 대신에 금속 막대기 3개가 아직 내 몸에 있음을 자각하기도 한다. 나를 토닥인다. 아파도, 힘들어도 묵묵히 일하고 공부하며 노력하는 세상의 사람들을 응원한다. 종교는 다르지만 오늘 나는 성당에 가서 모두를 위해 기도를 드릴 것이다. 특히 외롭고 힘들지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분들을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넘어져 울었지만 다시 힘을 내려는 수험생들을 위해. 다시 꿈을 꾸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는 이들을 위해. 나 또한 누군가의 축복과 기도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을 테니.



p.s. 평일임에도 나의 졸업 사진 행사를 위해 휴가를 낸 안드레아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냅니다. 그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인생의 많은 부분을 확신하지 못하지만 이 사실만은 변함없죠. 나의 수호천사, 안드레아. 이 글은 당신에게 드리는 진심 어린 헌사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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