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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마리아 Mar 18. 2024

서평: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제목: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언어 생활자들이 사랑한 말들의 세계


글쓴이; 노지양 X홍한별


발행: 2022년 3월 초판


출판사: 동녘



  인사말에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소개하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어느 번역가들의 모임, 처음 만나는 자리인지 베테랑들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어색한 인사와 소개가 오간다. 출판 번역의 특성상 내성적이고 소심한 면이 비교적 많다는 번역가 선생님들은 어느새 번역이라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점점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출판사의 편집자의 제안으로 두 번역가님은 편지의 형식으로 서로의 고충과 고민, 환희와 에피소드 등을 나누고 글로 엮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 분야에 관심이 없거나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에게도 과연 매력이 있을까 우려하는 심정을 함께 느끼며 매일 조금씩 읽었다. 그렇게 나도 이 책에 스며들었고 어느새 두 전문 번역가님들의 대화를 조용히 엿듣는 진지한 수습생이 되었다.



  이 책을 다시 들여다보며 먼저 하도 신기해서 메모해 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 언어의 마술사답게 두 분의 단어에서도 풍부한 어휘력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가령 '잘코사니'와 '에멜무지로' 등이 있다.



잘코사니: 명사. 고소하게 여겨지는 일. 주로 미운 사람이 불행을 당한 경우


에멜무지로: 부사. 단단하게 묶지 아니한 모양. 혹은 결과를 바라지 아니하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하는 모양.


  예: 에멜무지로 해 본 일이 그렇게 잘 될 줄은 몰랐다./표준 국어 대사전에서



  이 책의 구성은 크게 다섯 개의 소제목을 중심으로 노지양 번역가님과 홍한별 번역가님이 번갈아 가며 나눈 이야기, 메시지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에세이나 단상집을 읽듯 중간 마음 끌리는 챕터를 열고 읽어도 되는 자유로운 형식이다. 무조건 아무 곳이라는 게 아니라 주제를 먼저 인식하고 그곳에서 하위 제목을 바탕으로 주제나 내용을 상상해 가며 확인하는 과정이 즐거운 책이다. 



  1장의 '투명하게 쓰는 기쁨'이라는 주제로 두 번역가님은 주로 번역이라는 업에 입문하게 된 계기나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 생각을 논한다.  번역가에 대한, 번역을 굳이 하려는 이유 등을 언급한 곳을 읽다가 발견한 부분으로 나도 모르게 별표를 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번역가들은 말과 이문화(異文化)에 매혹된 사람들이다.'


/쓰지 유미의 <번역과 번역가들>



  노지양 번역가님이 또 다른 전문가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정말 그렇다고 느꼈다. 그 어떤 정의와 해설보다 정확하다고 느꼈다. 사전적인 의미는 아닐지 모르지만 심장을 관통하는 의미심장한 통찰 같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번역에 앞서 내가 실제로 영어라는 외국어에 빠지게 된 원동력이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련하리만큼 영어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민족의 말에 매혹된 것이다. 나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고 문화를 알고 싶었고 그저 그 기쁨을 느낄 수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번역을 하는 분 가운데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상당수 전문가의 시작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래서 실력으로 보나 뭐로 보다 훌륭하신 이 두 분은 세상의 무시와 오해, 번역이 돈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번역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고 오랫동안 소신 있게 해 내 가시는 게 아닐까?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뭔가 족집게 과외처럼 뭔가 확실한 방법이나 번역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별 재미도 없고 효용도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돈을 벌기 위한 상업적인 책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어떤 책 보다 진실되게 다가왔으며 솔직한 고백이 더욱 설득력 있었으며 위로가 되었고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이런 대가 번역가님조차 '파파고보다 못하다'라는 댓글을 보았았다는 부분에서는 내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도 했으며 정말 슬펐다. 이런 경험을 영원히 남을 책에 고백하신 것 자체가 대단하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전 마무리한 번역 수업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라면 과연 이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도 싶다. 과연 프로 번역가는 아무나 다 되는 게 아니며 롱런을 하는 분은 역시 다르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옮긴이의 진심'(3장)에서 어느 스탠드 업 코미디언이 언급한 번역가들 이야기가 너무 적나라하고 현실적이어서 웃펐던 기억이 있다. 20년 경력의 번역가가 원문을 10번 정도 읽고 일주일 동안 고심 고심해서 번역했지만 편집자의 의견이 달라 잘려나가게 되었고 반대 의견을 내고 싶었으나 결국 '을'의 입장에서 아무 말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끝없이 노력하지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인간이 바로 번역가라는 운명적인 묘사를 접하니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한번 그 기가 막힌 운명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Sisyphus)가 연상되기도 했다. 신들의 분노를 산 시지프스가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은데 정상에 도달하면 바위는 여지없이 굴러 떨어지고 이 형벌은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쓰면서 인생의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노동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고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불굴의 의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AI가 나날이 발전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매일 이 말을 속삭이며 기를 죽인다. '굳이 번역에 매달릴 필요가 있어? 시대를 너무 모르는 것 아닌가? 외국어를 굳이 힘들게 공부할 필요 없는 것 같은데.'라고 말이다.



   나는 과연 그 쳇바퀴 같은 삶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을까 종종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발전이 없는 것 같고 갈 길이 점점 멀어져 보일 때면 더욱 그렇다. 어쨌든 이 책과의 데이트는 번역에 대한 도전이 어리석은 나만의 고집인가 아니면 끈기의 한 과정인가를 곱씹어 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마음 한편이 아파지면서도 저편의 빛을 향해 가고픈 운명의 길에서 만난 멘토와 같은 책. 나도 이분들처럼 좌절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싶다고 소망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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