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은근한, 하지만 낯선 빛이 느껴져 잠이 깨었다. 아직 어둠 속. 이불을 덮었음에도 냉기가 느껴진다. 아, 맞다.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지. 낡은 집수리 및 리모델링으로 6주간 낯선 장소에서 지내야 한다. 어제 정신없이 포장이사를 마치고 그와는 별도로 기본 살림 및 옷, 도구, 생활용품 등을 바리바리 싸서 원룸에 들어왔다. 최악은 아니지만 난방 시스템 및 여러 조건이 일반 집과 다르다. 내게 맞춘 집과 불편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생활필수품만 챙겨 왔다. 벽걸이 시계 하나 없기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30분. 더 자야 한다. 잠이 모자라면 바로 두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기가 차서 일어날 엄두가 안 난다. 난방을 틀었으나 바닥 일부만 살짝 따뜻해질 뿐 공기가 너무 찼다. 카펫을 깔고 양말에 실내화를 신고 있어도 쥐가 여러 번 났다. 난로를 켜고 털 조끼에 패딩까지 입고 누웠다.
선잠이 들었다가 다시 깼다. 4시 40분. 그냥 일어나고 싶지만 추워도 너무 추웠다. 말이 오피스텔이지 그냥 작은 사무실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이중창이 아니라 그런지 창을 옆에 둔 안드레아는 밖의 외풍에 추워했다. 집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낡은 집이 그립다. 머리가 아파진다.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편두통. 집밥이 아닌 사 먹는 음식, 밀가루 음식을 먹고 추운 곳에 있으니 두통이 잦아지는 기분이다. 쥐가 나는 것도 그렇고 혈액 순환이 안 되나 보다. 자판을 치거나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손가락이 말을 잘 듣지 않아 당황스럽다. 추워서 손가락도 얼고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잠시 후 일어나 편두통 약을 먹고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화장실도 가야 했고 식전 약도 먹어야 했다. 두꺼운 성경 책을 가져오지 못해 매일 미사를 폈다. 오늘은 평상시와 달리 복음이 아닌 시작 예식을 펴고 <참회의 기도>와 <자비송>을 묵송(默誦)했다. 미사 때에 신부님과 신자들이 함께 교차로 바치는 기도문이기도 하다.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중략)
<자비송>
Kyrie, Eleison(키리에 엘레이손)
Chiste, Eleison(크리스테, 엘레이손)"
<매일미사> 5쪽, '미사 통상문' 중에서
키리에, 엘레이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크리스테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크리스테, 엘레이손은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 된다.
불평을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걸 안다. 사실만 나열한다 해도 말하다 보면 결국 투덜거림이다. 샤워를 하고 싶은데 추워서 엄두가 안 난다. 몸을 좀 녹이려고 차를 우려냈으나 미지근한데도 마실 때마다 목이 아프다. 전날 뜨거운 찌개를 먹다가 순식간에 목에 걸리더니 식도로 가는 길목에 화상을 입었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은데, 물조차 쉽지 않다.
불편함에 불평하고 아픔에 한숨 쉬는 나를 의식한다. 한편으로는 기계적으로 읊었던 참회의 기도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가 내게 다가옴을 느낀다. 나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문득 오래전 한 병원에서 갑상샘 질환을 치료해 주시던 주치의가 떠올랐다. 그분은 신자셨는지 늘 진료 후에 '환자분이 여전히 아픈 건 제 탓입니다.'라는 말을 하셨다. 아픈 걸 치료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사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진료에 필요한 말만 하고 다음 환자를 보기 바쁜 종합병원에서는 특히 그렇지 않을까. 내가 아픈 게 그분의 탓은 아닌데 완전히, 빨리 낫게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뉘앙스에 오히려 아픔을 호소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또한 김종원 작가님의 어른에 대한 글을 마음에 함께 새겨본다.
'어른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진실한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불편하니 불편을 호소할 수 있다. 아프니 아파할 수 있다. 실수하고 실패하니 실망하고 힘들어할 수 있다. 그래도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밝은 면을 찾으면 또 찾아진다. 살면 살아지는 것처럼. 그럼에도 여전히 고통스럽다면?
키리에 엘레이손. 신께 기도드린다. 도와달라고.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부모님이든, 사랑하는 사람 혹은 마음속 스승이나 지인도 좋다. 내가 의지하고 존경하는 존재, 포근하게 안기며 내 민낯을 드러내도 다 받아줄 것 같은 반려동물이면 어떤가. 힘들면 힘들다고 투정 부리며 함께 해달라고 고백해 보자. 두렵지만 나아가 보자. 어디선가 위로가 되고 미소 짓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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