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필사:그분은 왜 어린 양인가

by 애니마리아

인간은 죄를 짓는다.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반성하며 같은 실수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까? 가톨릭은 고해성사가 있다. 주요 7 성사(세례성사, 혼인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성품성사 가운데 하나다.


이 중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온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보속(죄를 용서받기 위한 행위, 보통 기도, 봉사, 묵주 등의 보속을 받는다)을 행하면 완성된다. 자신이 반성해야 할 죄가 있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미사 전 일찍 가서 진심의 성사를 드린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자율에 맡기지만 신자로서 일 년에 두 번 판공성사라고 해서 의무적으로 받게 되어있다. 한 번은 성탄 전후, 또 한 번은 부활전 전후에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론 중에 신부님이 문득 질문하셨다.

"그러면, 죄를 반복해서 지으며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죄를 짓고 바로 고해하면 되니까요. 때로는 죄를 짓기도 전에 그런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군요. '잘못 한번 하고 고해성사 보면 되겠군' 하고 말이죠."


과연 그럴까. 신부님은 이에 대한 답변을 주시진 않았다. 오히려 각자의 마음에 질문을 하고 생각하게 하셨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정말 나의 죄가 고해성사로 없어진다면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게 과연 진정으로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인가 싶기도 하다.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 내 안의 천사와 악마가 서로 대립하며 격렬한 토론이 일어나는 것 같다.


한편,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왜 하필이면 어린 양일까? 양은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제사에서 대표적인 희생 제물이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벗어나기(출애굽) 직전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죽음이 그 집을 '넘어가(passover)' 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 이전부터 양을 바치는 관습은 있었다.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생명으로서.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었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을 통해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돌아가셨다. 본인을 스스로 희생해서 공동체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타 제사에 쓰이는 양의 피는 그때그때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반복적으로 바쳐지는 제물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 한 번, 영원히 바쳐진 제물'이자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희생이 이후 인간의 죄짓는 행위를 모두 없앨 수 있었나. 왜 인간은 이후로도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고 있을까.


가톨릭에서의 '성체 성사'는 바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희생, 사랑을 기원하며 감사하는 의식이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행위는 단순한 인육을 먹는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간 인간이자 신의 행위를 온전히 내게 받아들이고 그처럼 선하게 살기 위한 다짐이다.


또다시 죄를 짓는다고 인간을 내치시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 희생을 악용하여 뻔뻔하게 죄를 반복할 수 있는가, 당당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답은 이전과 달라진다. 기독교에서는 용서와 사랑은 세상의 법치주의에서 정하는 죄와 형벌, 면책과는 다르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 같지만, 그냥 넘어가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아름다운 청년처럼 외모는 늘 화려하고 젊지만 내면은 점점 늙어가고 어둡게 썩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평생 죄를 짓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이 죄를 반복해도 된다는 특권을 주고 정당화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거나 양심에서 벗어나는 언행을 할 때 하느님의 어린 양이 두 번, 세 번 피눈물을 흘린다를 것을 안다면? 그 기분과 마음에 울리는 소리에서 각자 답변을 들을지도 모른다. 같은 잘못을 왜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지, 어째서 면죄 의식을 악용해서는 안 되는지를. 종교인이라면 기도 안에서 뭔가를 들을 것이고, 아니라면 양심에서, 혹은 마음의 불편함 가운데 뭔가가 걸릴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다이모니온'이라는 신령스러운 소리처럼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어떤 형태로 오든, 마음에 오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귀 기울이는 삶이 되길 바란다. 듣지도 못하는 것보다는 듣는 게 낫고, 들으면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귀 기울이며 충실히 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인류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이나 불필요한 비극은 줄지 않을까. 어차피 '인간의 본성이다'라며 자포자기하기보다는 그래도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마음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네가 이끄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