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서

by 애니마리아


몇 달 전 시아버님 생신 즈음 시골에 갔을 때이다. 산불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청송,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지만 늘 맑은 공기와 해맑은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 안드레아의 고향이자 아이들 마음의 고장. 늘 격한 환영과 사랑을 주시는 아이들의 조부모님의 샘터, 청송이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부모님의 덕을 쌓은 덕분인지 집만은 무사해서 감사하며 서늘해진 마음을 쓸어내렸던 순간이 다시금 떠오른다. 내게는 불과 일 년 전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느닷없이 벌어진 사고로 뼈가 부러졌던 아픔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개인의 충격과 화재의 공포를 속으로 삼킨 듯한 모습으로 다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팔은 좀 어떠신가. 며느리. 그간 고생이 많았겠군그래. 그대 아들 덕분에 나는 심심하지 않았다네. 이곳 어르신도 외롭지 않았고 말이지. 잘 쉬다 가길 바라오.'



화재도, 불의의 낙상 사고도, 어쩔 수 없는 가족의 헤어짐, 그 어떤 것도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그냥 일어난 일이다. 자연을 탓할 수도, 어쩌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인재를 분석하기도 애매한 일들. 때로는 자연의 섭리 속에 사는 생명으로서 일어나는 현상이었을까. 세월의 흐름 속에 약해지는 기력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라는 중력에 흔들린 생명의 운명이었을까.



이유와 동기가 어쨌든 우리 가족은 그렇게 한 장소에서 모였고 자연과 근원의 장소에서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산책이었을 수도 있고 잠시 볼일이 있어서 친척 집을 다녀오는 길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안드레아와 요한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문득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며 얼른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먼저 성인 아들을 두었으나 오랜 세월 고향으로 돌아온 중년의 가장이 눈에 띄었다. 곧이어 똑같은 모습으로 아빠와 나란히 걷는 아들의 모습이 유난히 닮아 보였다. 물론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었다. 성인이 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아빠를 따라 뒷짐을 지며 걷곤 했기에. 차이가 있다면 아빠보다 커진 아이의 모습이 어릴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그저 귀엽다거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의 느낌 정도였다. 이번에는 뭐라 할까, 두 사람이 똑같아 보이면서도 뭔가 균형의 추가 다소 바뀐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치 이어달리기에서 배턴 터치를 하듯 삶의 축이 아이에게 좀 더 이동했다고나 할까. 아빠가 어린 아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다 자란 아이가 때로는 아버지의 동료처럼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며 가는 듯했다. 구체적인 말은 없어도 삶은 그런 것이라고, 기쁜 일도 많지만 때로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세월의 무게 속에 덩치도, 키도 바뀐 두 남자의 뒷모습이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고 반듯해 보이면서도 기울어져 보였다. 사랑스러우면서도 애틋하고 행복하면서도 지쳐 보이는 부자.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고마웠다. 두 사람의 닮은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끈을 느낄 수 있었고 외롭지만 함께 고독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존중, 존경과 인정을 쌓는 기회로 기억할 수 있어서 소중했다. 그저 우스꽝스러운 이야깃거리가 아닌, 존재의 가치와 가족이라는 마음속 앨범에 사진을 남길 수 있었으니까.



가족이라도 모든 순간이 이렇게 평온하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이 지루하고 반복의 연속이며 힘든 순간이 더 많은 것처럼 사람의 관계도 그 종류를 막론하고 잔잔하다가도 순식간에 흔들릴 것이다. 그런 순간에 언제든 꺼내 보며 힘을 낼 수 있는 추억을 마음속에 간직하길 바란다. AI와 같은 이성과 논리 정연한 답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함. 그 불완전한 사랑이 오히려 살아갈 의지를 일으킬 힘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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