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이끄는 대로

by 애니마리아


아이가 집에 와서 함께 서점을 갔다. 가끔 보는 아이와 외식을 하거나 도서관을 가는 것도 좋았지만 단둘이 서점을 간 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가끔 들러서 주로 학습 만화나, 역사물, 필요한 책만 사준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나와는 취향이 다른 걸 알기에 그날도 우리는 서점에 들어서서 자연스럽게 각자 관심 가는 책 코너를 둘러보았다. 요즘은 물건을 굳이 사지 않아도 온라인몰에서 둘러보는 추세다 보니 오래간만에 오프라인 서점에 온 것 자체가 어색하기도 했다.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책 자체보다 아이와 단둘이 데이트를 하는 기분에 들떠 있었고 그 자체로 좋았다.



대개의 서점이 그렇듯 입구부터 소개된 베스트셀러, 신작, 화제의 책 등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다 둘러보기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릴 테니 한두 군데 골라서 단 몇 권이라도 좀 읽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어떤 책이 인기가 있는지 경향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주로 앞쪽에서 눈에 띄는 표지나 제목 위주로 뒤척이고 있을 때였다.



아이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속으로 '벌써 지쳤나? 가고 싶은가?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책일까? 역사책? 스페인에 관한 책?'


"엄마, 엄마가 좋아하는 코너 아직 안 갔죠? 내가 발견했으니 같이 가 볼까요? 엄마가 관심 갈 만한 곳 봐 두었음!"



엄마가 좋아하는 코너라고? 처음에는 이 말이 왜 그리 낯설면서도 설렜는지 몰랐다. 나는 무척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래? 가 보자. 나를 위한 코너를 발견했다고? 뭘까?"


이 말을 하면서도 나는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혹은 사고 싶은 책이나 굿즈가 아닐까 추측했다. 괜히 사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돌려 말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아이가 안내한 곳은 입구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마침내 그 코너의 이름이 시야에 들어왔다. '영어 및 원서 분야'였다. 내가 혼자 가거나 시간이 촉박한 경우라면 처음부터 가곤 하는 코너다. 그곳은 내 관심사가 많은 곳이 맞다. 하지만 종이의 질이 국내서와는 달라서 몇 번만 훑어보면 책이 말리고 중고책처럼 변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외서 대부분은 두꺼운 비닐로 단단히 포장되어 있어서 읽어볼 수가 없는 게 흠이다. 투명 비닐을 통해 앞표지와 가격이 있는 뒤표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인터넷 서점으로 미리 보기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어서 더욱 아쉽다. 눈이 점점 안 좋아져서 글자 크기나 행간의 여유, 문단의 집약도, 무게 등 책의 물성이 주는 감각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터넷 미리 보기만 보고 구입했다가 실제로는 글자가 너무 깨알같이 작아서 읽지도 못하고 폐기 처분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도 좋았다. 어떤 책을 보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가 외서 코너로 나를 데려간 이유가 더 큰 의미로 다가왔으니까. 엄마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관심사가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함께 나누고 나의 생각을 듣고 싶어야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단 몇 초였지만 아이가 먼저 제안하는 것에 따라 어디론가 가거나 먹거나 체험하는 게 잊지 못할 즐거움을 준다. 실제 내용은 크게 상관없다. 아이가 어릴 때는 주로 이런 역할을 부모가 하고 아이는 수동적으로 따르거나 일방적으로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그 역할이 다소 바뀌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는 아이가 되고 자녀는 또 다른 어른이 된다. 알면서도 그 시간을,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아이처럼 따르게 된다.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발적 연기는 일종의 '역할놀이'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를 위해 주로 부모가 연기한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하고 흉내를 내며 관련 활동이나 책, 영화, 굿즈 등을 제안한다. 가끔 고가에 별 쓸모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이를 위해 함께 체험하며 순간의 기쁨일지언정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기도 한다.



어느 날 아이가 자라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찾고, 좋아하는 장소에 가고 좋아하는 옛날 음악이나 배우에 관심을 보이며 함께 이야기한다. 자신의 취향과 다르고 그리 좋아하지 않더라도 뭔가를 공유하고 공감해 주며 대화를 이끌어낸다. 아이의 마음을 깨닫는 순간, 기쁘고 고마우면서도 늙어가는 나의 존재가 느껴져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한다. 행복과 세월을 느끼며 내가 그랬듯 아이의 성숙을 받아들인다.



거짓은 나쁘다고만 생각했다. 항상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거짓이 오로지 나를 방어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면 나쁜 게 맞다. 하지만 그 거짓이, 척이, 연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타인의 기분을 위한 배려라면 거짓은 악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하얀 거짓말'의 필요성을 믿는다. 아이가 좋아하지도 않고 무관심한 그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 기억만으로도 나는 성인이 된 아이의 배려를 경험했다. 아이가 부모에게 선사하는 친절은 또 다른 사랑의 방식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이날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무슨 책을 보았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날 아이가 먼저 그곳으로 이끌었다는 사실만은 남을 테니. 그 기억이 오래오래 가길 바란다. 아이는 언젠가 나보다는 함께 하는 누군가를 위해 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될 테고 나는 추억을 먹고사는 사람이 될 테니.



이날의 경험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 보니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타인이 아닌 가족 간에도 이 말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옳은 일과 친절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선택하라.'

-<원더> R, J. 팔라시오 중에서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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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

R. J. 팔라시오 2025 Penguin Random House Children's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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