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님, 오늘 표정이 밝아 보이세요.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나요?"
"아, 그래요? 딱히 좋은 일이... 있었던가 싶네요. 잠시만요. 생각 좀 해 보고요."
기분 좋은 일? 팔 수술 부위가 아직 굳어 있어서 물리치료를 간 날 담당 치료 선생님이 나를 보자마자 하신 말씀이다. 마침 진료 일이라서 도수치료와 함께 예약을 잡았었다. 그날은 여러 가지 일정이 겹친 날로 오히려 정신이 없었고 날씨까지 추워서 다니기 그리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두통에 여러 스케줄을 소화하느라고 진이 빠진 상태였다. 중간에 확인하고 해결해야 할 다른 일까지 끼어들어 정신이 없기도 했다. 계획과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야 안심이 되는 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스트레스의 요인은 개인마다 다르다. 내 경우 갑자기 할 일이 몰리는데 시간이 부족할 때 심리적 압박을 느낀다. 해야 할 일은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게 문제다. 균형 있게 계획을 세워도 틀어지기 쉬운 이유는 실제로 일은 계획과 소망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가하다고 느낄 정도로 아무런 징조가 없다가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몰려오면 당황스러워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날 아침에 일찍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글을 쓰는 멤버들과 지도 선생님과의 문학과 투어 일정이었다. 처음으로 가는 곳이어서 긴장이 되었고 길치라서 시간에 맞추지 못하고 헤맬까 봐 조마조마했다. 특별한 일정이 없을 때 하는 루틴을 다 할 수가 없었다. 우선 일찍 나서야 해서 운동을 갈 수가 없었다. 아침에 하는 루틴 외에 중요한 업무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했다. 두통 때문에 잠을 줄이는 일은 자제하고 있으니까.
주요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부족하지만 걷기로 그날 운동을 갈무리하기로 했다. 전철역에서 집에 갈 때 버스가 아닌 도보로 가기로 하고 병원을 들렀다. 서둘러서였는지 예약한 시간보다 오히려 일찍 도착했다. 갈 데도 마땅치 않아서 바로 병원 진료를 문의했는데 거의 바로 접수를 해주셨다. 진료 때도 의사 선생님과 충분히 상담을 했다. 게다가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도수 치료 시간도 알아서 앞당겨 주셨다. 이런 배려를 받으니 감사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감사 일기에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요즘 목 뒤쪽이 수시로 굳어서 컴퓨터 작업에 애를 먹고 있었다. 도수 치료를 하다 보면 팔도 풀어주시지만 타는 듯한 통증을 풀어주실 게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도수 치료 선생님과 수다를 떨게 되었고 기분 좋은 질문과 생각으로 감사할 거리가 늘어났다. '배려를 받아서, 꼼꼼하고 친절한 도수 치료를 받아서, 더 아프지 않아서, 힘들고 정신없는 상황이지만 더 악화되지 않아서 등등.
좀 더 앞선 일정에서의 수확도 되짚어보았다. 시간은 좀 더 걸렸지만 맛있는 점심을 먹어서 좋았고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되어 좋았다. 극 내향인라서 많은 사람과의 모임에서는 쉽게 피곤해지지만 4~5명과 모여 공통 화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역사와 문학에 대해 배우니 기뻤다. 사람을 만나고 부담 없이 헤어지고 상호 대화를 통해 배우고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체험한 순간이었다.
순간의 기분에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를 단상으로 끄집어내어 감사하고 기록으로 남길 결심을 하니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었다. 의지만 있으면 AI로 거의 모든 것을 배우고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오프라인의 만남과 수업, 몸과 정신을 움직이고 단련시킬 필요가 있기도 하다.
문득 김민식 작가님의 말이 떠오른다.
'인공지능이 있다고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지 않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에 이런 대답을 드리고 싶어요. 자전거, 자동차와 같은 편리한 수단이 있으니 인간은 걸을 필요가 없나요? 여전히 인간은 혼자든 모여서든 걷고 뜁니다. 왜일까요? 육체의 건강과 정신에 끼치는 영향 때문이지요. 삶의 엔도르핀이 돌지 않습니까. 외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AI를 이용해도 상관없습니다. 편리한 상황에 쓰면 됩니다. 그럼에도 힘들게 외국어를 공부하면 오래, 깊게 남습니다. 공부는 수고스럽게, 힘들게 해야 나의 것이 되고 오래 남습니다. 인지적 근육, 건강에 도움이 되며 효능감 또한 높아지겠죠.'
김민식 작가님 강연에서
움직임은 필요하다. 나는 집순이라 더욱 억지로라도 시간을 정해서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마음껏 계획대로 강도 높게 하지는 못하지만 하루, 이틀 하지 못해도 아예 멈추지는 않으려 한다. 육체적인 운동이든 정신적인 활동이든 나의 고유성을 지키고 뭔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억하고 할 일이 있어 보인다. 감사할 거리를 찾고 감사하고 기록하고 움직이고 가끔 누군가를 만나며 소통하는 것. 욕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순간이 의미가 있고 배움이 있다.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서 좋다. 평범하게 흘려보낼 순간을 기억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감사를 억지로 하지 않고 기도처럼 나의 삶으로, 나의 일부로 함께 살아가고 싶다. 어색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