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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마리아 Jun 19. 2024

19화:피아노 치는 남자


  얼마 전 아이가 드디어 첫 휴가를 받아 나왔다. '삐비빅' 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엄마~저 왔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선크림을 덕지덕지(건조한 피부 탓) 바르고 있던 나는 당황했지만 나갈지 말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크림에서 나온 하얀 얼룩 마무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 왔으니까. '버선발로 나간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면회나 외출의 기회로 아이를 잠깐 보거나 전화 통화로 그동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가 집에 있을 때나 대학생이 되었을 때보다 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을 살피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리 소소한 내용을 주고받더라도 소통하는 행위만큼 가치 있고 가족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게 있나 싶다. 아이를 독립시키는 부모의 입장이 이런 건가 새삼 느끼고 있다. '아빠, 힘내세요. 엄마, 사랑해요'와 같은 간지러운 노래나 표현을 듣는 시기는 지났으나 서로를 생각하고 응원하는 마음 자체가 사랑의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하는 것 같다.









 인생의 가장 싱그러운 젊음을 발산하는 시기인 만큼 누리고 싶은 때에 군대에 가서 맞은 첫 휴가에 친구를 만나고 즐기고 싶은 것들이 또 얼마나 많겠는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재미없는 엄마를 위해서 집에 들러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고 담소를 나눈 후 휴가를 즐기러 나가는 아들이었다. 마침 엄마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어 이때에 맞추어 휴가를 냈다는 말에도 얼마나 고맙고 기특하던지.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고슴도치 엄마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리를 못하는 나는 아이에게 뭐라도 시켜주고 싶었지만 집에 오자마자 먹고 싶은 것은 라면이라고 했다. 컵라면 말고 냄비에 끓이는 봉지 라면. 군대에서는 자신의 스타일로 끓여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라면을 끓일 때도 대충 눈대중으로 하지만 아이는 물 0.5리터, 재료 몇 미리 이렇게 최대한 정량을 지켜서 엄격하게, 나름 제대로 요리해 먹는 것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본 아이가 라면을 끓이는 모습을 보기만 하는 데도 나는 마치 그게 일생일대의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이 소중하게 쳐다보았다. 혹시 아이가 눈치챌까 흘금흘금 안 그런 척 아이의 행동을 쳐다보며 하는 말에 대꾸하는 나 자신을 의식하며 나도 '엄마인가 보다' 생각했다. 



  허기를 채우고 나서 아이는 모아 둔 용돈으로 산 중고 피아노에 다가갔다. 집에서는 안드레아가 가끔 치지만 피아노의 주인은 엄연히 아들이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알기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가 없었다. 몇 년 만에 건반을 두드리며 예전에 연습하던 곡을 다시 연주하는 선율에 잠시 몸을 맡겼다. 중간에 한두 번 실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연주로 기억될 것 같다. 노인이 된 아들이 노모 앞에서 재롱을 부리니 노모가 기뻐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는 고사가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안드레아와 연애할 때 종종 자신은 긴 머리에 청바지가 아닌,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주 어린 시절 잠시 피아노 학원 다닌 것 외에는 피아노 칠 일이 없었다고 말하니 그는 이내 수긍했다. 가끔은 나도 피아노 치는 남자도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의 피아노를 둥둥 두드려보는 안드레아를 볼 때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비록 왼손으로 하는 반주는 '도미솔, 도미솔'의 화음을 벗어나진 않지만 말이다. 



  군복을 입고 피아노 치는 아들의 뒷모습을 잠시 감상하다 말고 얼른 카메라를 켰다. 아이는 감사하게도 내가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남기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고 허락해 주었다. 사춘기 때는 농담으로 초상권 침해니 사생활 보호니 하며 정색하기도 했지만 아이의 변화와 배려가 몇 번이고 감사와 은총으로 느껴진다. 엄마보다 더 일찍 철드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막내이고 아이는 첫째라서 그럴까? 이유야 어쨌든 아이의 꾸밈없는 뒷모습을 또 언제 볼까 싶어 영상으로 남겼다. 



  작년과 또 다른 여름, 무더운 여름이 더욱 힘들 것이다. 나와 안드레아는 세월이 빛의 속도로 가는 듯한 착각을 느끼지만 아이는 시간이 이토록 천천히 가는 곳이 있을까 싶나 보다. 짧고도 강렬한 첫 휴가를 보내고 귀대하는 아들에게 안드레아는 말했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잘 자고, 잘 먹어야 해. 부대로 복귀하면 아마 한동안 후유증에 심리적으로 더 힘들 거야."



  얼핏 상투적인 말투의 반복인 듯싶기도 하지만 경험에서 우러나는 충고이자 애틋한 아버지의 말이었다. 아무리 휴가가 길어도 복귀는 힘들다고 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압박감이 느껴지나 보았다. 아이를 세상에 내보낸 엄마지만 군대를 가지 않은 여자는 알 수 없는 고통일 테지. 차마 피할 수 없으니 즐기려고는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모든 게 네 덕분에 엄마와 가족은 잘 지낼 수 있고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말로 격려할 뿐. 



 ' 대한민국의 모든 군인들, 파이팅. 그리고 감사합니다. 북한의 동향에 따라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누구보다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실 분들, 힘내시길 기도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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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과 피아노군인과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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