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시험을 봤다. 언제부터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만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선배들처럼 취업 준비의 당연한 코스라고 여기고 수업을 들었다. 대학 2학년 영어를 부전공으로 택했을 때 토익 특강 수업을 들을 때부터인 것 같다. 졸업 후에 한동안 안 보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 얼마 안 되어 정기적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시험 접수를 하고도 철저히 준비를 못 한 경우가 태반이다. 많이 보면 볼수록 점수 올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무작정 몇 달간 계속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고 꼼수 마케팅과 단기 수업으로 공부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뭐든지 조금만 바짝 노력하면 초급에서 중급으로 가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중급에서 고급으로 가는 길은 한 계단 오르기도 힘들고 서 있는 계단에 머무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런 면에서 어학 공부는 다이어트와 많이 닮아 있다. 의욕이 최대치에 이르는 초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지만 점점 무뎌지는 결과 수치에 의욕은 점점 사라지고 의심이 생기며 슬럼프에 빠지곤 하니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연례행사처럼 매년 보려고 계획을 세운 후 시작한 루틴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출산과 육아 등으로 중간에 몇 년씩 쉼이 있었지만 짬을 내어 책이나 온라인 수업 등을 이용해 짧게 공부하며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유효기간이 2년이다 보니 토익 공식 사이트에도 최근 본 시험 한두 개만 보관되어 있어 정확히 추적할 수가 없었다. 아마 십 년 이상은 된 듯싶다. 누가 시킨 것도, 당장 어디에 제출해야 할 상황도 아니지만 일 년에 최소 한 번 이상은 보려고 한다. 눈도 점점 안 좋아지고 팔꿈치도 아프다. 딱딱한 의자에 두 시간 이상 앉아 있다 보니 전에 없던 고통이 밀려오지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은 만난다는 설화처럼 토익 시험은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만나야 할 나만의 루틴이 되었다.
일요일 아침 신랑 안드레아 덕분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수험장에 도착했다. 최근 몇 년간은 광명에서 '광명 북고'가 유일한 시험 장소였는데 이번에는 '소하 고등학교'가 지정되었다. 첫째가 다니던 학교라 왠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학부모로서 온 게 아니라 수험생으로 학교에 들어서는 느낌도 참 묘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아이를 가르친 선생님이 감독관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뭔가 찔리는 사람처럼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4층까지 올라갔다. 접수를 빨리했는지 비교적 앞 고사실의 앞 번호에 배정되어 안심했지만 고사실이 4층부터 배정되어 있었다. 아침에도 턱턱 막히는 더위에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미니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물병을 챙겨 와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교실을 찾아갔다.
오! 문을 여니 아무도 없었다. '8시 50분이 다 돼가는데 아무도 없다고?' 처음이다. 작년에는 최소한 두세 명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깔끔하게 정리된 교실에 처음으로 들어가니 좋았다. 공부 준비는 양껏 하지 못했지만 뭔가 여유 있게 시험을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한 번은 신분증을 못 챙겨서 시험을 못 본 적도 있었고 급하게 뛰어 들어간 적도 있어서 시험 볼 때도 정신없는 상태로 치러 많이 아쉬운 경험도 있다. 이후로 입실 시간은 9시 20분이 아니라 9시라고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임하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생겼다. 일 년에 한 번이지만:)
앞에서 두 번째 자리. 나쁘지 않다. 맨 앞자리면서 교탁 바로 맞은편보다는 훨씬 나았다. 자리를 잡고 벼락치기로 메모한 노트를 꺼냈지만 교문을 지날 때 학원에서 나누어 준 토익 기출 어휘집을 훑어보았다. 10.5cm*15cm의 작은 메모지 크기였지만 듣기와 읽기 부분, 기초에서 고득점 기출 어휘까지 다양하게 들어 있었다. 시험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마무리하기에는 꽤 알찬 내용이었고 남은 시간 다 볼 수 있었다. 무거운 토익 교재보다 이런 어휘집이나 나만의 복습 노트로 정리하며 워밍업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괜히 불안감에 두꺼운 책을 가져가 보았자 무겁기만 하고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아날로그시계를 가져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평소에 잘 차지 않으니 시계가 멈춘 것도 몰랐다. 설상가상 안드레아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교실에 큰 벽걸이 시계를 칠판에 놓아두지만 고개를 들 때마다 감독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곤 해서 선호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시간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집중해서 문제를 풀자고 마음먹었다. 종료 15분과 5분 방송이 나올 것이기에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관건이었다.
이제껏 토익시험은 연습이든 실전이든 듣기가 상대적으로 덜 힘들었다. 결과도 마찬가지다. 독해 시간은 늘 부족하고 한 번에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번 읽는 때도 있다. 그러면 당연히 시간이 부족하다. 한 번에 주요 내용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바로 문제 답을 골라야 하지만 한 번이라도 다시 읽으면 한두 세트는 꼭 찍거나 대충 풀게 된다. 이중, 삼중 지문에 연계 질문과 꼬인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점점 조여 오는 시간 압박에 심리적으로 불안과 스트레스가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그것도 실력이겠지만 평소 찬찬히 들여다보며 공부하는 태도를 시험 중에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시험은 평소와 다른 이유로 당황했다. 우선 에어컨 문제다. 감독관이 한 사람이라도 불편하면 듣기 평가 시간에 에어컨을 끈다고 하셨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오랜 시간 듣기 문제를 풀며 더위를 견디는 게 힘들어서 그랬을 테다. 나도 눈치를 보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다. 테스트 방송 상태를 보니 그리 방해될 것 같지 않아서다. 하지만 막상 시험이 시작되니 중간에 울림이 있어 제대로 못 들은 문제가 초반부터 나왔다. 가장 쉬운 부분이라는 파트 1도 꽤 어려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정답을 고르는 것보다 오답 소거법을 이용해도 소용없었다. 애매한 발음에 찝찝한 기분으로 답을 골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기분에 머물러 계속 그다음 파트까지 영향을 끼치긴 싫어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정말이지 토익 시험은 심리 싸움이 반인 것 같다. 얼마나 평정심을 유지하고 내 페이스를 이끌어가느냐가 중요했다. 매번 교훈을 얻으면서도 일 년이 지나는 동안 잊은 것 같아 자책하는 기분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듣기의 고비를 겨우 넘기고 공포의 독해 시간이 왔다. 정신없이 풀다 보니 시간 감각이 없어졌다.'부족하면 안 되는데. 시계가 없으니 집중!'을 되뇌면서도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아파지고 다리가 시려오는 등의 고통이 간간이 나를 공격했다. 여느 때처럼 문제의 요지를 잊고 지문 내용이 헷갈리며 놓친 부분이 없나 생각하느라 점점 느려지는 것 같았다. 마침 들려오는 방송 '15분 전!'. 크게 막히지 않으면 얼추 다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읽고 있던 지문이 생각이 안 나서 다시 읽기 시작. '이런, 저질 기억력의 소유자여!'
떨리는 심정으로 겨우 풀어낸 답안의 칸을 채우다 보니 손이 덜덜 떨린다. 마지막은 늘 힘겹다. 다 풀고 나서 5분 남았다는 방송이 나왔다. 참 드문 일인데. 듣기 시간에 워낙 고전해서 그랬는지 독해 시간은 지켜서 참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너무 급하게 풀어서 오히려 오답률이 많아지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여하튼 시험을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앳된 모습의 학생들이다. 나이로 봐서는 다들 내 아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좋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부모뻘인 나를 보고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심히 바라본 이도 있을 테고 저 나이에 왜 아직도 토익 시험을 볼까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험 결과에 상관없이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동시에 힘겨운 도전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토익에 매몰되어 너무 허우적대지 않기를, 때로는 그 자체를 즐기며 실력을 쌓아가길. 군대에 가 있는 아이가 생각나서 더욱 애틋한 기분이 들었나 보다.
긴장감이 풀리며 화장실을 들렀다 학교 건물을 나오니 더운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이내 저편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였다. 집에 갔다가 다시 시간에 맞추어 마중 나온 안드레아. 주말도 반납하며 특이한 아내의 루틴을 지켜주느라 고생하는 남편을 보며 힘겨웠던 시험은 빨리 잊자고 다짐해 본다. 아, 이럴 때도 나의 기억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