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 나오는' 기적(奇跡)'의 종교적 의미는 '신(神)에 의해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두 번째 뜻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표준국어 대사전)이다. 신의 은총을 받든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든 기적은 인간의 이해와 능력을 벗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미사 중 신부님이 '기적'을 소재로 강론을 펼치실 때였다. 그날의 복음 주제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었다.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친숙한 복음 가운데 하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오천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는데, 제자들에게 주어진 음식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 후 음식이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몇 광주리가 더 남았다는 이야기. 오랜 세월을 거쳐 이에 대해 자주 언급되는 설명이 있다. 예수님이 마법사처럼 깜짝 신기를 발휘한 게 아니라 타인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모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음식을 내놓았고 결국 기적처럼 보였으리라는 추측이다.
신자로서 매년 이 복음을 읽거나 강론을 듣거나 하며 종종 접하게 된다. 우리 스스로 이타적인 마음을 실천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나눔의 기적'을 일으키는지 느끼면서 반성하곤 한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려고 과연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라는 측량기를 스스로에게 대보면 부끄러워지기 때문이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더 아끼고 절약하며 나누어야 하는데'라는 소리가 내 머릿속 문을 두드리는 듯했다. 이런 나눔, 선행, 봉사, 환경 보호와 같은 가치가 언급되면 십분 동의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아가 느껴져 왠지 찔리는 기분이 든다.
독서자가 그날의 복음을 읽은 후 신부님의 강론이 시작될 무렵 나는 또 양심에 찔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나기 전 아이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잠시 이런 묵상을 하며 분심(分心)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문득 신부님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정말 돈이나 물건 같은 물질만을 의미하는 걸까요? 나눔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 내가 무언가 가치 있는 물건을 반드시 소유하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뭔가를 끌어낼 수만 있다면요."
나는 속으로 '내면에서라니? 무슨 뜻이지'라는 의문의 들었다. 이어진 강론은 이러했다. 세상에는 '정신적인 기적'도 있다. 바로 '인내'를 발휘하는 방법이다. 밖에서 친구나 동료 등 외부인과 만나면서 서로 다른 성향과 이해관계로 사람들은 다툴 때가 있다. 갈등과 충돌은 비단 밖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으며 가정 내에서도 가능한 현상일 수도 있다. 의견이 맞지 않아서 가치관이 달라서 혹은 서로의 대처 방법이 달라 상처받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가족이니 무조건 피할 수만은 없다. 잠시 피해있을 수는 있어도 영원히 떨어져 있을 수도 없으니까. 행복한 가족,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이 되고 싶지만 늘 이해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 가까이 지내기에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하며 억울하기도 하다.'
가족이지만 갈등이 생기면 바로 피하거나 억지로 친할 수도 없을 때도 있다. 그때 할 수 있는 나눔의 행위가 바로 '인내'라는 것이다. 가령 부모는 자식의 반복된 실수나 넘어짐을 보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질책이나 조언, 혹은 맹목적인 믿음, 사랑 사이에서 혼란을 겪기도 한다. 때로는 갈등의 불길이 너무 크지만 당장 끄기에 너무 힘겨울 때는 최선을 다해보다가 결국 기다려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바로 그 기다림이야말로 인내를 통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믿음이나 사랑, 희망을 새로 갖거나 회복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기다림이며 사랑이고 결국 내면의 기적을 이루는 근본적인 자질이다. 인내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와 나눌 의향이 있어야만 발휘할 수 있고 '용서'와 같은 기적을 낳을 수 있다.
인내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씀이 끝나고 또 주어진 묵상의 시간이 왔다. 억지로 내 마음을 뒤틀어 올바른 도덕에 틀에 넣기보다는 기다림의 시간을 인내하는 마음을 키우도록 도와달라고 은총을 빌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지기를, 수용과 인정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인내의 기적을 위해 작은 용기를 낼 수 있길 희망하면서. 물론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참는 것은 해결책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괴로울 테지. 하지만 참다 보면 전보다는 좀 더 편안해지고 수용하며 누군가를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고 차분하게 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