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트북 >(2004년)을 떠올릴 때면 늘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영화 말미에 가녀려 보이는 부잣집 여주인공과 가난하지만 성실한 남자 주인공이 힘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는 로맨스에 안도할 찰나 '헉'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그저 주인공의 친척이나 조부모로 보이는 노부부가 간간이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바로 로맨스의 당사자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젊은 시절 아름답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어느새 사라지고 주름과 엉성한 몸짓이 그들을 대체해 버렸다. 특히 할머니는 심각한 치매 증세가 있어 보였으나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알뜰살뜰 돌보며 끊임없이 사랑스러운 말을 건넸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은 할머니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 할머니와 서로 맞잡은 손, 어눌하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그들의 역사가 참 아름다워 보였다. '아, 천생연분이란 저런 것일까? 저렇게 함께 늙어가는 부부가 참 보기 좋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물긴 해도 상대의 허물, 늙어서 추한 모습까지도 끌어안는 반려자가 존재할 수 있다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 앞에 화려한 젊음이나 외모에 사로잡힌 연인들의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강렬함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23년 전 그를 만났다. 소개팅이라는 기회가 주어졌고 호기심에 나간 자리였다. 그는 30살에 가까운 나이에도 마치 시골에 사는 13살 소년처럼 부끄러움이 많고 수줍은 미소를 슬쩍슬쩍 보이는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모태솔로였고 그는 오히려 연애 경험이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평소의 우리와 다른 모습이 나왔다. 스스로 말주변이 없다고 생각한 나지만 나는 끊임없이 재잘댔으며 그는 대화를 이어나가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벌게 지곤 했다. 나중에 그가 하는 말이 왠지 너무 떨려서 나를 만나기 전에 우황청심환을 하나 먹고 왔다고 했다.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마음이 섬세하고 여린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내심 신기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 사귄 사람과 결혼한 나는 비교해 볼 대상이 없었기에 그의 섬세한 면을 당분간 잊고 있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양가 어른의 생신이나 경조사 챙기기만도 벅차서 작은 기념일 같은 것은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어느 날 그가 다가오더니 대뜸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게?"
"응? 누구 생일인가? 아닌데. 무슨 날이지?"
"음, 사랑이 식었어. 오늘 밸런타인데이인데. 벌써 잊다니!"
그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투정 부리는 아이의 흉내를 냈다.
"아, 밸런타인데이구나. 아, 깜박 잊었네. 미안, 대신 다음 달 화이트데이는 신경 안 써도 돼."
"싫어, 난 화이트데이 챙길 거야."
그런 남편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과연 우리가 중년, 노년이 되어도 이런 알콩달콩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생각해도 까탈스러운 면이 꽤 있는 내 성격은 그와 살면서 수없이 무장 해제되었다. 이후에도 버럭 하는 남편을 현명한 아내가 진정시키는 전통적인 드라마와는 다른 양상이 종종 펼쳐졌다. 그 덕분인지 나의 무심함은 그의 잔정으로 좀 더 주변에 대한 관심을 지향하게 되었고 인생에서 웃음과 소소한 행복이 주는 기쁨과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평소 습관적으로 드리마를 보지는 않는다. 아주 유명하거나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말이다. 대신 관심사가 생기면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게 생활화되었다. 반면에 남편은 MZ 세대들과도 소통해야 한다며 드라마, 영화, 스포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대중문화를 즐긴다. 얼마 전 그가 다가와 졸라대기 시작했다.
"나랑 '눈물의 여왕' 드라마 보지 않을래? 엄청 재미있어. 색시는 아마 울 거야. 시청률도 '선업튀(선재 업고 튀어)'보다 훨씬 높았대."
"자기는 봤으면서 뭘 또 봐. 다시 보면 재미없잖아."
"아니야, 또 봐도 재미있을 것 같아. 혼자 보니까 심심하고 재미도 별로 없고 이해도 안 가. 색시랑 같이 보면서 얘기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음, 나 할 일 많은데. 과제도 있고."
"그러면 주말에 몰아서 보자. 어때?"
"내가 졌다. 알았어."
"약속?"
"약속~"
지천명을 사이에 두고 걸어가는 우리 부부는 유치하지만 함께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관계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사랑을 희생으로만 본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싶다. 시간을 들여 즐거움을 함께 하려는 제안과 시도가 추억으로 겹겹이 쌓여 권태에서 벗어나고 서로를 지켜주는 마법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