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냥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 언제부터인가 이런 감정도 나의 한 부분이니 무조건 없애려고 하지는 않지만 제어가 쉽지 않다.
아직 미성년자이고 성격도 나와는 다른 아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처받을 때가 있다. 내성이 생겨서인지 전보다는 좀 덜하지만 거친 말투나 억양, 혹은 차가운 시선을 느끼면 불편함을 느낀다. 왠지 무시당한 느낌을 받아서다.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한다. 감정에 휩쓸려 우울해지는 나를 돌보기 위해서다.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말라>(유은정)라는 책의 제목을 떠올리거나 기도를 잠시 하거나 심호흡을 하기도 한다.
'그래, 그런 때야. 사춘기 때는 원래 그래. 원래? 그러고 보니 글쓰기 강사님이 언제가 말씀하셨던 보편적인 단어가 주는 시선이 떠오르네. 그런데 좋다는 말인지 안 좋다는 말인지 결론이 애매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강연에서 혹은 책에서 타인과의 대화에서 듣고 나누며 마음속에 새긴 방법을 써 보기도 한다. 한 가지만 해도 나아지기도 하고 여러 개를 한꺼번에 시도해 볼 때도 있다. 별다른 효과가 없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노력하는 게 중요하니까.
그날도 아이의 어떤 행위 때문에 화가 난 순간의 감정이 다른 때보다 좀 강렬하고 오래갔다. 마침 남편이 곁에 있어서 내 심정을 가감 없이 내뱉고 말았다. '조잘조잘, 이러쿵저러쿵 '아, 속상해...'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나는 그저 함께 속상해하거나 공감의 표정만 지을 것 같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마법은 부리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은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알면서도 그냥 말하고 싶은데 당장 말할 대상이 없으니 가끔 내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게 된다.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남편은 속을 안 썩이잖아. 나는 아내 말을 잘 들어, 그렇지? 내가 속상하게 하면 색시는 감당 못 할걸? 나라도 착한 게 어디야."
반박할 수 없는 논리에 나는 피식 웃고 만다. 자화자찬 섞인 농담인데 밉지 않다. 희한하게도 해독제를 마신 듯 고통이 반감된다. 쓰디쓴 커피에 물을 타서 연하고 부드럽게 한 모금 마시고 편안해진 기분이다.(이제 커피는 거의 마시지 못하지만)
순간 이 사람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사나, 살아갈 수 있을까 슬퍼졌다. 내 마음을 99% 이상 보여줄 수 있는 사람, 베스트 프렌드. 그가 있어서 무너지지 않은 순간이 너무 많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극강 'INFJ'인 내가 마음을 열고 입이 터져 조잘대게 만든 사람. 자신은 무교이니 성당에 가자는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 하지만 어느 날 가족을 위해서 함께 하고 싶다며 세례를 받은 사람, 나의 안드레아!
우리는 함께 미사를 드리러 간다. 미사 중에 우리만의 의식이 있다. 천주교 미사는 크게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나뉘는데 말씀 전례 때 신부님이 강론이 핵심이다. 제1 독서와 제2 독서가 끝나면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러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성경 책이 있는 단상으로 걸어 나오신다. 그때 남편은 나의 손을 잡는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례상 의무도 권유 사항도 아니지만 우리 두 사람은 늘 손을 잡고 말씀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행복을 느낀다. 속상한 일이 있거나 화가 나거나 우울하거나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울 때 나의 영혼이 위로받는다. 우리 두 사람은 이에 대해 서로 말한 적은 없지만 소중한 우리만의 의식이 된 것을 느끼고 있다. 설렘보다는 안식이고 짜릿함보다는 평화다. 불만이 감사로 바뀌고 사랑을 기억한다.
며칠 후 퇴근을 한 남편은 회사에서 받은 상품권을 건네며 말한다.
"나는 너무 양심적이야. 그냥 내가 써도 모를 텐데 그대로 아내한테 갖다주고. 그렇지?"
나도 나름 남편을 웃게 해주고 싶어서 썰렁한 개그 반응을 내놓는다.
"맞아. 자기는 70%의 수분과 30%의 양심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잖아. 양심 빼면 시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