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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희 May 08. 2024

마이너 필링스

Cathy Park Hong 에세이




우선 BTS, 싸이, 블랙핑크 그리고 국위선양을 위해 애쓴 모든 이들에게 무한 감사를 전한다. 그들은 우리를 'Bad Korea(북한) or Good Korea(남한)?'에서 'Oh I love Korea!'로 만들어주었다. 지구본에서 한국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들어본 적도 없었을 시대에 사는 미국은 어땠을지, 작가가 겪었을 수많은 일들과 감정들을 차마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캐시 박 홍은 자기를 혐오하는 아시아인은 본인 세대에서 끝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자라면서 한국말을 못 하는 척하고 한국과 자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척 자신은 백인과 다를 게 없다는 것처럼 꽁꽁 싸맨 2세 친구들을 여럿 봤다. 어느 날은 구석에 몰래 숨어 너무나도 유창한 한국말로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있는 친구를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다. 무엇이 그들을 숨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이 스스로의 identity를 부정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지만, 역부족이라는 기분에 함몰된 내 상태를 감추기 위해 물밑에서 미친 듯이 발을 저으며 언제나 과잉 보상을 한다.

캐시 박 홍의 에세이는 소수민족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그들이 감내한 차별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감정들을 잘게 잘게 분해하여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수치심, 불안, 우울감 등 상처로 남을 수 있는 여러 감정을 정화할 새도 없이 정화되지 못한 물속에서 일단 살고자 열심히 발을 저을 수밖에 없는. 가끔 주위에서 애들 교육을 걱정하며 이민에 대한 조언을 구해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어린 나이(0~4세)에 오거나 아니면 다 커서 이미 자아가 건강히 자리를 잡은 후에 오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성향에 따라 쉽게 잘 적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어린 마음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인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 아시아인은 미안스러운 공간을 차지한다. 우리는 진정한 소수자로 간주될 만한 존재감조차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는다.

작가는 아시안에 대한 차별에 주목하여 이 속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꼬집어 얘기한다. 미국에서 아시안으로 사는 것은 진정한 소수자로 간주될 만한 존재감조차 없어서 미안스러운 공간을 차지한다고 말하며 때문에 '다른 아시아인들과 함께 있으면 결속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경계선이 흐려지고 한 무리로 뭉뚱그려져서 더 열등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나는 미안스러운 공간이라는 말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이 문장을 떠날 수 없었다. 내 존재가 미안해지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어 전학을 가게 됐다. 새로 간 학교는 ESL(English Second Language - 영어가 제2 언어인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없는 전형적인 백인 학교였다. 당시 아직 영어가 서툰 내게 담임 선생님은 한 남자아이를 불러내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부탁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태어난 2세 캐나다-한국인이었는데 선생님이 본인을 불러낸 이유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마치 자신의 부끄러움인 것 마냥 매우 불편해 보이는 듯한 태도로 나를 피해 다녔다. 그의 태도에 어린 나는 또 한 번 상처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또한 다름을 부단히 숨기느라 바빴겠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서 "음, 나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 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나'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은 굳이 특정해서 표시되지 않으며 자유롭게 본연의 너와 내가 될 수 있다는 신념에 기대 사회경제적 위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가 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는 백인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학자 찰스 밀스는 말한다.

정말이지 문장이 아니라 페이지를 뜯어서 고정해 놓고 싶을 정도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 유독 많은 챕터는 <백인 순수의 종말>이다. 책을 내려놓고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위 대목을 읽으며 순수와 무지에 차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순수는 지속될 수 있도록 보호되어야지만 무지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차별은 순수가 아니라 무지라고 보는 게 맞다. 무지는 무죄인가? 아이들의 무지는 무죄이지만 어른의 무지함도 무죄라고 볼 수 있을까? 무지성에서 비롯된 순수한 폭력의 결정체, 이것이 차별 아닐까?


작가는 순수를 뒤집으면 수치심이 된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멋모른 채 선물로 받은 플레이보이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가 아이들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비웃음을 사고, 이번에도 또 뭐가 잘못됐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알 수 없어 얼굴이 화끈거린 기억을 안고 사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아주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중학생 때였나, 엄마가 어디서 옷을 사 오셨고 새 옷을 입고 신나는 마음으로 학교에 입고 간 티셔츠에는 69라는 숫자가 눈에 띄게 크게 써져 있었다. 쉬는 시간 애들이 나를 둘러싸고 "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입고 온 거야?" 하며 놀렸고 도대체 이 티셔츠가 무슨 문제인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겉에 걸치고 온 청자켓 앞단추를 급하게 잠그고 제발 빨리 집에 가서 이 문제의 티셔츠를 벗어버리고 싶다는 수치심으로 하루를 견뎌야 했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우리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행해서, 엄마가 어떤 식이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늘 바짝 경계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민자 부모님을 둔 자녀라면 모두 이 대목에서 공감의 한숨을 내뱉을 것이다. 사실 내가 당하는 수치심 보다도 더 수치스러운 것은 부모가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인데 부모와 자식은 암묵적으로 서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수면 위로 올리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영어를 거의 못하는 엄마가 행여라도 단어를 잘못 발음해서 괜한 놀림감이 되거나 그 이유로 무시를 당할까 노심초사하며 긴장하게 될 때, 당당하던 부모님이 위축되는 모습을 보게 되고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내 우주가 흔들림과 같으며 동시에 존재의 뿌리까지 흔들어 버려 약해진 뿌리로 살아가게 한다.


영어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살짝만 잘못 디뎌도 내 존재가 노출되는 투명한 인계철선을 쳐두고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언어였다.

외국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나는 아직도 영어와 사투 중이다.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언어가 나를 보호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영어. 나는 내가 한국어로 읽고 쓰는 이유가 유독 그냥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인 줄 알았고 한국어에만 있는 예쁜 표현들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건만, 아 그게 아니라 영어는 나를 자꾸 수치심으로 몰아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책 리뷰가 개인적 경험담으로 전환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는 그만큼 작가가 꼬집는 이슈들이 절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는 너무 부정적이게 보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좋았다. 마냥 예쁘게 포장할 수 없었던 진실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대놓고 안전하게 풀어헤쳐놓은 듯한. 책 초반에는 번역이 다소 불편한 감이 있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이렇게 약간의 날것 그대로인 느낌에 번역이 아니었다면 적나라한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속에서는 몸이 젖어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희열과 슬픔을 기록하며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minor feelings, 절대 사소하지 않은 이 감정들을 적나라게 꼬집어준 캐시 박 홍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 책갈피

아시아인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 아시아인은 미안스러운 공간을 차지한다. 우리는 진정한 소수자로 간주될 만한 존재감조차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는다. 다양성 요건을 채울 만큼 인종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나는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지만, 역부족이라는 기분에 함몰된 내 상태를 감추기 위해 물밑에서 미친 듯이 발을 저으며 언제나 과잉 보상을 한다.
다른 아시아인들과 함께 있으면 결속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경계선이 흐려지고 한 무리로 뭉뚱그려져서 더 열등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영어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살짝만 잘못 디뎌도 내 존재가 노출되는 투명한 인계철선을 쳐두고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언어였다.
수치심을 일으킨 공격자가 내 삶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내 그림자를 그자로 착각하여 몸을 움츠린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우리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행해서, 엄마가 어떤 식이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늘 바짝 경계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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