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선넘기
캐나다에도 드디어 꽃이 피는 봄이 찾아와 아빠는 요즘 정원 가꾸기에 한창이시다. 올해는 동생의 결혼을 축하하고자 화려한 색의 꽃들로 정원을 꾸며보았다며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오셨다. 정원을 돌보는 일은 사계절 내내 손이 많이 간다. 봄이 오면 땅에 구멍을 군데군데 뚫어 숨을 쉬게 하고, 비 오는 날을 기다렸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준다. 여름에는 잔디가 금세 자라 온 동네가 잔디 깎는 모터 소리와 풀냄새로 진동한다. 틈틈이 잡초를 뽑아줘야 하고, 잔디가 타지 않게 물을 잘 주어야 한다. 가을에는 수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긁어모으는라 집집마다 낙엽이 수북이 담긴 종이봉투가 줄지어 늘어서고, 겨울이면 쌓인 눈을 치우고 땅이 얼지 않게 소금을 뿌린다. 엄청난 대저택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집은 울타리나 담장이 없고, 인도와 마당 사이에 뚜렷한 경계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마당을 넘나들기가 쉬운데, 집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책임은 주인에게 있어 겨울철엔 더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여러모로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집을 비워야 할 땐 걱정이 많아진다. 한 번은 부모님이 한국에 오래 머물고 계시던 때였는데, 캐나다에 있는 이웃집 아줌마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캐나다의 봄은 5월까지도 날씨가 들쑥날쑥해, 정성껏 가꾼 꽃들이 밤새 내려앉은 서리에 얼어 죽는 일이 종종 있다. 우빙 예보가 있어 혹시나 꽃이 얼을까 걱정이 되어 비닐로 하나하나 덮어두었다며 사진을 보내주셨다. 본인 정원도 아닌데 남의 집 꽃들을 걱정해 주는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어느 날은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 날이었다. 아무도 치운 사람이 없었는데 차가 나갈 만큼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알고 보니 매일 아침 일찍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가는 아빠를 위해,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 집 앞 눈까지 함께 치워 주신 것이었다. 동네에는 'Neighbourhood Watch(지역 공동체가 함께 서로의 집 주변을 지켜보며 범죄를 예방하는 제도나 캠페인 이름)'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이웃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뜻으로 낯선 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경고 문구이기도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선은 넘는 순간 마음을 무너뜨린다. 처음은 우연일 수 있지만, 같은 일이 두 번 반복되면 결국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게 된다. 내게는 어떤 일이 그랬다. 어느 날 누군가 느닷없이 찾아와 불쑥 사과를 한다. 이유는 두 번 다 비슷했다. "어떤 소문을 듣고 네 험담을 했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니었더라고. 오해해서 미안." 혹은, "알고 보니 그렇게 떠들고 다닌 사람들이 쓰레기였더라고." 사람과 쓰레기를 같은 문장 안에 놓음에,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알맹이 없는 텅 빈 사과에, 그리고 누군가 뒤에서 나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고 수군거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보통 사과는 진심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데, 그런 마음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사과했으니 그들 마음은 좀 편해졌던 걸까. 정말 미안했다면 조용히 수습해 주는 편이 더 나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상처 입은 마음에 묻고 따지지도 못했다. 타지의 한인 사회는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의 일어나는 일들은 때로 더 어렵고 복잡하다. 한 사람과의 불화가 모두와 등지는 일이 될 수가 있고, 불필요한 말들이 지나치게 오가며 자주 말이 와전되거나 부풀어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잘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좁은 관계망 안에서는 이마저도 따지며 지내기 어렵다.
한 때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드레스 사진이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드레스 사진이, 어떤 사람에게는 파랑과 검정, 어떤 사람에게는 흰색과 금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가 주변의 빛과 환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내가 본 것이 맞다'는 확신마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구나. 내가 믿는 것이 항상 옳은 건 아닐 수도 있구나.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단톡방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넌 색깔 얘기하고 있는데 그런 말이 왜 나와?” 대화창에는 별다른 대답 없이 ㅋㅋㅋ만 길게 이어졌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그런 순간이 하나씩 쌓였다. 지금이야 그런 말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사람사이에도 결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몰랐던 그때의 나는, 대화의 결이 어긋날 때마다 그것이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나를 내보이는 일이 오히려 나를 공격대상에 놓이게 하는 듯했고 어느 순간부터 나를 감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누군가 내게 다가와주길 바라는 마음과 상처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함께 공존했고, 그렇게 나는 점점 애매한 선을 긋는 사람이 되어갔다.
높게 쌓여가던 경계가 무너진 건, 의외로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국 회사에 입사한 첫 주, 옆팀이었던 한 동료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회사 건물은 둘러봤냐는 물음에 아직이라 하자, 따라오라며 대뜸 나를 데리고 나갔다. "원래 새로 입사하면 휴게실부터 먼저 파악해야 해요"라며, 이용 방법부터 언제가 사람이 없어 좋은지까지, 신나서 알려주는 그녀가 신기했고 덕분에 잔뜩 얼어 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간식을 한가득 사가지고 와서는, 한국에서 일하는 게 처음이면 낯선 게 많을 것 같다며 살뜰히 챙겨준 그녀와 지금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친구를 사귀고 싶어 나간 동네 모임에서도 나를 집으로 초대해 준 언니가 있었다. 말을 놓자며, 존댓말을 쓸 때마다 500원씩 벌금을 내자고, 모은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자며 다가와 준 언니는 이제 결혼도 하고 이사도 갔지만, 나는 여전히 언니를 따라다닌다. 혼자 지내면 냉장고부터 든든해야 한다며 이것저것 장을 보아 문고리에 걸어두고 가던 해정이, 퇴사하던 날 "이제 '님'자 빼고 친구 하는 건 어때요?" 하며 조심스레 물어와 준, 이제는 진짜 친구가 된 팀원 아름이. 모두 먼저 선을 넘고 다가와 인연이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생각을 나누던 애정을 가지고 나보다 나를 더 깊이 이해해 주고, 내가 몰랐던 내 마음까지 완성시켜 주는 씀노트 사람들도 만났다. 이들은 마치 내 인생의 산신령 같았다. 산을 지키는 산신령처럼, 서로의 집을 지켜주는 Neighbourhood Watch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정원이 하나씩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는 그 정원에 조심스럽게 들어와 꽃을 가꾸고, 가지를 다듬고, 물을 주고 간다. 또 어떤 이는 꽃을 밟고, 마른 가지를 꺾고 간다. 모든 선 넘기가 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그 안에 있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아 주는가이다. 내 정원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나를 꽃처럼 봐주는 사람과 이웃이 되면 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경계 위에, 다정함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오늘도 정원에는 꽃이 활짝 피어난다.
우리 집에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니? 너란 꽃을 찾으러 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