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7시에 방문한 한강뮤지엄은 황랑 했습니다. 두 달 전쯤 처음으로 운전면허를 따고 이번이 10번째쯤 운전이었는데, 역시 누군가를 옆에 태우고 운전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긴장되는 마음이 간혹 튀어나올 때 조금 눈치를 살폈고요. 그렇지만 운전하는 건 썩 재밌는 일인 것 같습니다. 뚜벅이로는 몇 날을 고민해야 갈 수 있는 거리를 한 시간이면 쏘아 갈 수 있는 것. 짧은 여행을 가는 즐거움인 것 같습니다.
함께 가기로 한 선영언니와는 벌써 알게 된 지 반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스터디에서 처음 만난 언니는 어딘가 모르게 어른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이미지였어요. 함께 스터디하기로 한 인원들이 늦게 오는 덕분에 언니랑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 와중에 저는 제 가방을 다 풀어헤치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되게 이상한 상황인 것 같기도 한데 그때는 그냥 언니랑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정말 재밌었습니다. 자신을 잘 알고, 다양한 분야에서 박식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 첫인상은 그런 다정하고, 멋진 신여성이었습니다.
그런 언니와 함께 차를 타고 30분 거리를 돌아 한 시간 만에 도착한 한강뮤지엄. 그 시간대에는 저와 언니 둘만 있어서 마치 우리가 대관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 전시는 <폭신폭신>이라는 기획전이었습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고뇌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관통하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현대미술은 참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인간 부재를 그린 작품들, 자신의 고통의 경험을 표현한 작품들을 지나 인간 소외를 표현한 영상들, 달걀 껍데기로 표현한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 작품 등등을 보았습니다. 어렵지만 일면 궁금해집니다. 작가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들을 만들게 되었는지. 작품 초입에 짧은 설명으로는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전시의 초입에는 지석철 작가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진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들여보니 유화로 그린 그림결이 보였습니다. 옆으로 놓인 하나의 의자, 무더기로 그려진 의자들. 그를 보며 지나간 사람의 흔적과 숨겨진 익명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저와 연을 함께했던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을 생각했고, 무더기로 스쳐갔던 인연들을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 것처럼, 그림 속 빈자리는 그런 흔적을 가시화한 것 같다는 생각이요.
전시의 말미에는 서기환 작가님의 전시였습니다. <사람풍경>이라는 연작으로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아름답게 표현한 초현실주의 작품들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자신의 가족을 그린 것 같은 그림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부부와 아이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다채로운 색상들로 구성한 작품들로 눈이 즐거웠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직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 편안했고요. 아직 예술을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인 제게는 가장 쉽게 해석하면서도 기분 좋아지는 작품들로 전시 구경을 마쳤습니다.
이 날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책 <모순>을 함께 읽고 선영언니와 이야기하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주변 제 나이 또래의 동성 친구들에게 한 번씩 옆구리 찔러 읽어보라고, 이 책으로 같이 얘기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영업을 열심히 해왔었는데 언니도 그 영업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고맙게도 언니는 그 책을 정말 열심히 읽어서 조각조각 인덱스를 붙이고 가져왔습니다. 책 얘기로만 두세 시간을 떠들고 웃었습니다. 사랑과 이별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습니다.
"언니는 사랑을 해본 적 있어?"
책을 읽을 때는 나라면 김장우와 나영규 중 어떤 선택을 했을지, 그 주인공에 대입해 읽었습니다. 언니는 이 책을 면밀히 분석하며 어떤 대목에서 공감하고 반박하는지 이야기해 주었는데요. 그러면서 언니가 겪은 진실된 사랑이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제 과거의 기억들을 아주 오래 곰곰이 생각했어요. 내가 해왔던 것이 사랑이었을까. 그래서 사랑은 무엇일까.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쏟아져 나온 거짓말을 덮을 수 없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여질 지를 생각해 거짓을 말하고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솔직합니다. 책 제목과 같이 모순된 대목이죠.
사랑을 하고 싶었습니다. 군데군데 사랑을 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당시의 제가 온전히 건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숙했고 서로 상처를 꽤 많이 주고받았습니다. 상대에게 미안한 감정도 듭니다. 예전 만남에서 저는 상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구와 달 같은 존재였어요. 이 이야기는 언젠가 쉽게 풀이할 수 있을 때 남겨야 할 것 같아 아껴두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저는 정말 사랑했다 말할 존재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랑한다는 기억 하나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한편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런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마음이 쿡쿡 아팠던 짝사랑의 기억도 다시금 떠오릅니다. 호르몬의 농간 같은 거라고 애써 웃었었지만 그때는 정말 많이 쓰리듯이 아프기도 했었으니까요. 그건 사랑이었을까 혼자 제 마음에게 물어봅니다. 처음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는 감정들 때문에 헷갈립니다. 제게 과거의 기억들은 간혹 독이 되어 속이 불편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는데, 누군가는 아름답게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부럽습니다.
진짜 솔직하게 남기고 싶었던 글이 결국 이렇게 또 추상적인 감정들 나열로 끝나게 되어 아쉽습니다. 아직은 제게 시간이 더 필요한가 봅니다. 막상 키보드를 놓고 글을 쓰려고 할 때는 정말 솔직한 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저를 구성하는 지금의 저는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로 만들어진 건지 누구보다 잘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아주 예전으로 돌아가 아픈 마음들을 끄집어내야겠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저도 저를 알고 싶기에 보다 건강하고 솔직해지면 다시 써보겠습니다. 그때까지 제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실 많은 분들께 감사합니다. 특히 선영언니. 함께 짧은 여행속에 이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진심으로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또 가요~!)
[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은 구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