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복병은 어디든 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을 복병이라 하니, 당연하게도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 숨어 있다가 당황케 하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이 관련한 일에서의 복병은 늘 두렵고 무섭다. 어째 최대한 없게 하려고 애를 애를 쓸 수록 더 늘어만 가는 느낌은 진정 기분 탓인가.
처음 이혼소송을 시작할 때. 남편없는 삶에 대하여 고려하긴 했으나,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이유는,
1.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세히 예상하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크다.
난 이미 아빠 없이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뭘 같이 한 적이 없다. 그는 항상 공부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므로 항상 나 혼자 아이를 이고 지고 다녔다. 그럼에도 지치고 힘들 때에나, 아이가 예쁘고 똘똘한 것은 본인을 닮아서라고 윽박지를 때에는 몹시 억울하기도 하고 서러웠지만 그렇다고 옆에 남편이 있었으면 하지도 않았다.
나도 사실은 그와 함께 무엇을 하는 것이 몹시 챙피하고 싫었다. 뭐하나 잘하는 것이 없이 협조적으로 하지 않고 생색내는 꼴과 엄마인 나의 노고 따위 개뼈다귀로 아는 그 사고방식이 정말 싫어서 개조하고 싶은데 그럴 의지도 필요도 못 느꼈다. 없는 사람이라고 치는 게 너무 편했다.
하지만, 소송을 시작하니 다르다. 현실적으로 다르다기 보다는 내 마음이 이미 여러가지에서 지고 있다. 아이에게 원죄가 있으니, 괜찮은가 눈치를 보고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잠만 자는 아빠더라도 집에 누군가 들어왔다 나가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이 또 다르긴 하다.
2. 사실 그 때는 진짜 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다른 더 큰 문제들에 쌓여 있으므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2년이 지나고 나도 여러가지로 달라졌다. 인정받지 못하며 한달에 10만원으로 모든 것을 몸으로 때우며 빈궁하게 살다가. 회사에서 대우도 받고 여러가지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다 보니, 다른 일들의 무게가 작아져서 아빠없음. 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 어이와 양심없음을 매일 겪지 않다보니, 어느새 나도 그 지겨움과 괴로움을 잊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당장 없어서 아쉬운 점이 먼저 생각나고. 인간이란 다 그렇다.
하지만 냉정히 펼쳐놓고 보면, - 인간이 주관적이고 합리적이지가 못해 이렇게 펼쳐놓지를 못해서 그런 것일 뿐. 사실 저런 남편은 있는 것은 또 그대로 엄청나게 괴로웠을 것이고, 종합점수로 비교할 때. 내 판단은 굉장히 남는 장사.였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 . .
어린이집의 가을운동회 공지가 떴다.
가족이 모두 참여하는 운동회라고 들었는데.. 안가면 안되는 분위기려나...
불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니, 온통 아이들이 그리고 색칠한 가을운동회 포스터 들이 붙어있다.
그리고 운동회 참석여부와 참석자를 묻는 명단에는,
세상에나 한명도 아빠가 안오는 집이 없네.
빈자리는 초라하다. 그 존재의 자질에 상관없이,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일단 초라함은 지고 가야한다. 그 후에 그걸 극복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나와 우리 아이만 초라하게 둘이서. 나지 않는 흥을 억지로 띄워가며, 행여나 아이가 시무룩해 할까봐 눈치보며.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다 답답해져온다..
하나님 저도 중요하잖아요. 저 너무 불편하고 싫어요. 원래 체육대회 이런 행사 엄청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이번에는 안가고 싶어요. 안가도 된다고. 해주세요.
아니 이 어린이집에는 한부모 가정이 없나. 아무리 그래도 어쩜, 이렇게 배려를 안하고 무작정 홍보를 한담. 이런 거 안하고 그냥 평범하게 보내면 안되는 거야...?!
부모 중에 우리 직원들도 10명이나 되는데 내가 가면 그들이 불편할거야. 막상 날이 다가오면 다른 애기들도 많이 빠질거야. 운동회는 피곤하니까 어디 휴양림을 갔다오는 게 낫지.
가고 싶지 않으니, 이미 안가기로 결정하고 줄줄줄 나오는 변명들을 읊조리다 그만 두었다. 마음 바꾸지 못하도록 다음날의 휴양림도 예약해버릴까 했지만.
이건 나를 위한 이야기인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나 말고, 우리 아기는 어떨까. 아이는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할까.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나에게 뭐라고 하실까.
. . .
주일 예배를 드리고, 무사히 운전을 하고 갔다와서 마음이 조금 펴진 저녁.
고민 끝에. 숨겨두었던 한마음 가족운동회 초대장을 아이가 먹는 국수그릇 옆에 놓아준다.
초.대.합.니다? 엄마 이거 지안이네 집에 초대한다는 말이야?
어 그런가? 아가가 한번 뜯어봐! 뭔지 엄마도 궁금하네?
한.마.음. 가족운동회? 가족? 엄마! 운동회에 가족도 오는 거였어?
어. 그런가보네!
.... 엄마. 엄마 회사 방학하면 안돼?
응? 아 엄마 회사 가지 말라구?
응 그날 회사 방학하고 운동회에 와.
음... 과장선생님께 이야기해볼까? 아가 운동회에 가야한다고...?
응 꼭 가야한다고 말해봐. 엄마 꼭 와.
조르는 것도 아니고, 떼쓰는 것도 아니고.
무심한 듯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하고 다시 국수그릇에 코를 박고 먹고 있는 것을 보며,
우리 아가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아빠를 일상에서 지우고, 늦게 오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매일. 매일. 허기가 몹시 졌겠지.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빠의 자리는 (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분명히 있잖아요. 평범한 일상에선 괜찮은데,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 어렵습니다.
확실히 엄마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제가 아무리 아이를 위하여 운전을 배우고, 못하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주어도 - 아이는 그 노력을 잘 알지 못하고, 아빠가 집에 버티고 있는 것과 아닌 것은 확연히 다르겠지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저 모지리는 있어봤자 무슨 소용일까 싶어요. 사교성이 없어서 부모들과 어울리지도 못할 것이고, 나서서 운동회에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그 외에 갖가지 말과 행동으로 저를 못살게 굴고, 그럼 매일 싸웠을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뭔가를 같이 했을 리도 없고, 그 와중에 우리 아기가 행복했을 리도 없어요.
무엇보다 있어봤자. 말도 안되는 논리로 운동회 같은 것 절대 참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남편이 있으나 없으나, 저는 그냥 혼자 가족운동회에 갈 운명. 이었다고 결론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