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에게로 가는 시간- 33년을 건너온 육아일기(임신과 출산편)
1992년 12월 13일 일요일
나는 우리 아기가 현명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 바란다.
세상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서 비겁하지 않은 씩씩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원한다.
투사나 열사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세상을 좀 더 지혜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
진실로 평범함의 위대함을 알고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친절한 성향을 지니고 몸과 마음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지혜로운 어른으로 자라도록 돕고 싶다.
우리 부부는 자주 이런 얘기를 하며, 우리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노력을 다짐한다.
요즘 남편과 나는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한다.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가,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가.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려면, 우리부터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2025년 11월 8일 토요일
아기 때문에 내가 이토록 좋은 사람이 되려고 다짐했었다니, 참 기특하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하다.
나는 그리 좋은 사람으로 살지 못했다.
나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지혜도 간헐적으로 있다 없다 했으며,
친절한 성향 역시 많이 부족했다.
다정도 체력에서 나온다고, 내 몸이 힘들고 고단하면 못되게 굴었다.
무엇보다 아들의 성장 과정에서 때론 너무 넘쳤고, 많은 부분 부족했다.
그 모든 시절에 아들에게 비친 내 모습이 그리 자랑스럽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설령 아들은 엄마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한다 해도,
나는 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핑계 같지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굽이굽이 힘든 시간도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었어야 했고, 좋은 엄마였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만큼은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노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해본다.
그 최선이 때로는 부족했지만, 때로는 충분했다고 믿고 싶다.
"우리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던 92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완벽한 부모는 될 순 없지만,
그 다짐을 기억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고.
아이는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부모를 보며 자란다고 아들의 모습을 보며 그럭저럭 위로한다.
아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평범함의 위대함"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투사도 열사도 아니지만,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어쩌면 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아들은 그걸로 충분한지 나는 모른다. 그건 또 그의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