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나에게로 가는 시간-33년을 건너온 육아일기(사회 편)
2026년 2월 25일 수요일
2006년 우리 아들은 중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돼서 학교폭력이라는 생각도 못한 일이 생겼다.
3월 말쯤 담임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는데 학교에 와 보라는 거였다.
좋은 일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아들은 운동을 좋아하는 건강한 체질이었고, 정서적으로 안정적이며 성격도 무난해서
그동안 친구관계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같은 학년의 한 아이가 계단에서 아들 뺨을 때리며 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걸 지나가던 선생님이 보고, 우리 아이 담임선생님한테 전달한 것이다.
나중에 캐보니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세 번 째라고 했다.
나의 대응은 즉각적이고 집요한 맞대응이었다
솔직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내 아들을 건드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이 쿵쾅거린다.
나는 어릴 때 방학이면 김포에 너른 논을 갖고 있던 작은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곤 했었다.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 옛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나른한 한여름 오후였고 나도 같이 나른했다. 고모와 삼촌이 오기를 기다리며 혼자 마당에 앉아 ‘오늘은 뭐 하고 놀까’를 생각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름 하늘의 뭉게구름은 솜사탕 같아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멍하니 바라보기에 좋았다.
그때 매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빙빙 도는 것이 보였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사이에 등장한, 적당히 위협적인 조연 같았다. 그러던 그 새가 무서운 속도로 직하강하며, 저 앞에서 놀고 있던 병아리를 향해 내려왔다. 그 순간 어미 닭이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며 거의 날다시피 달려와 병아리를 덮쳤다. 매도 당황한 듯했다. 만만한 병아리를 노리고 내려왔는데, 어미 닭이라 덩치가 컸다. 암탉은 엄청난 소리와 퍼덕거림으로 저항했고, 지붕 위까지 끌려갔다. 결국 매는 소득 없이 닭을 놓치고 몇 바퀴를 돌다 날아갔다. 암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 장면은 내게 동물의 왕국에서나 볼 법한, 잊을 수 없는 생존 다큐였다.
내 아들이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바로 그 어미 닭이 되었다.
우선 아들에게 물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을 겪었는데 왜 선생님이나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혹시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았는지도 확인했다.
협박은 없었지만,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하던 친구라서 고자질할 수 없었다고 했다. 고작 열네 살 아이는 순수했다. 자신이 잘해주면 그 친구가 달라질 거라며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들은 그런 아이였다.
상황 파악이 끝나자마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시아주머니가 경기도교육청 장학사로 계셨다. 학교가 미온적으로 대응할 경우를 대비해, 학교폭력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교육청에서 인지하고 있다는 걸 학교 측에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는 학폭위 같은게 없었다. 그 정도로 중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가해 학생을 다른 시로 전학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한 번 약한 아이로 찍히면 계속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 안이 아니더라도, 좁은 동네에서 언제든 다시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러나 중학생의 경우 이사가 아니면 강제 전학이 어렵다고 했다. 학교 측은 가해 학생에게 한 달간 복도 수업을 시키겠다고 했다. 나는 폭력은 습관이 될 수 있다며 재발 방지가 최우선이라고 재차 강조하면서 가해학생의 상담 치료도 제안했다. 이미 당한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 입회하에 가해 학생의 부모도 만났다. 정중한 사과를 받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남자아이들끼리는 그럴 수도 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이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자신의 아이가 가해자라는 말을 듣고는 상대 아이가 체격이 작고 좀 모자란 아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키도 크고 멀쩡해서 놀랐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또래보다 키가 컸다.
나는 그 말에서 깊은 절망을 느꼈다. 약한 사람은 괴롭혀도 된다는 뜻인가? 원시시대도 아니고, 체격이 작고 순하면 언제든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인가! 여기서 멈추면 안 되겠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비공식 대응도 필요했다.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가해 학생을 아무도 없는 복도로 불러냈다.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막상 마주해 보니 이미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아이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내 아들을 건드리면, 너희 부모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회적으로 문제 삼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우리 아이가 너를 고자질하지 않은 이유는, 끝까지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라고. 넌 그런 친구를 잃은 거라고, 네 평생 가장 귀한 친구를 잃은 거라고 말했다. 부모에 대한 위협보다 그 말에 아이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에게도 친구는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방과 후에 내가 운영하는 학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 아이 엄마가 했던 말에서 느낀 불안감, 약육강식의 사고방식을 학원 강사에게 전했더니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셨다. 또다시 털끝하나라도 건드리면 뼈도 못 추린다는 협박이 필요했다. 남학생들의 세계를 아는 선생님들이었다. 영어, 수학 선생님은 둘 다 등치가 산 만한 남자였다. 그것은 그 어머니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대응이었다.
다행히 그 뒤로 단 한 번도 폭력은 없었다. 아들은 여전히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며 중학교를 잘 마쳤다. 가해 학생하고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에 배정되어 중, 고등학교 동창이 되고야 말았다. 이후로 서로 만나면 눈인사와 간단한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아이가 자신의 힘을 비뚤게 사용한 일을 거울삼아 좋은 사람으로 성장했기를 바란다.
지나고 보니 내가 과하게 대응했고, 어쩌면 유치하고 치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객관적이고 점잖은 대응 따위는 할 수 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더 순하고 교양 있게 대처할 자신은 없다. 내가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때 분명, 병아리를 지키다 죽어간 어미 닭처럼 굴었다.
그 이후로 학교폭력에 관한 기사와 사회적 논의를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폭력’이라는 말은 낯설었다. 아이들 사이의 거친 장난쯤으로 치부되었고, 부모들은 성적과 진학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언론은 ‘학원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학교 안의 폭력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점점 깨달았다. 가정에서의 육아가 사랑과 인내의 문제라면, 학교에서의 성장은 훨씬 더 복잡한 사회의 거울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2011년, 한 중학생이 학교폭력의 고통을 유서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많은 부모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내 아이는 안전할까?’ 그 사건 이후 학교폭력은 더 이상 불편한 교육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인권의 문제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23년, 학교폭력은 또 다른 얼굴로 돌아왔다. 가해 이력이 입시와 공직,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는 논쟁이 이어졌다. 교실에서 시작된 일이 한 사람의 평생과 사회의 공정성까지 흔드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와 『Human Acts』에서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다음 세대가 같은 상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거라고 해석하고 싶다. 기억되지 않은 고통은 반복되지만, 기록된 고통은 산 자의 삶을 살리는 힘이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아들에게 있었던 20년 전 학원 폭력을 펼쳐보며 내가 쓰는 글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기를 소망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한 생명을 돌보는 일을 넘어,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이나 정서에서 분리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된다는 말처럼, 개인의 육아도 사회의 교육도 돌아보지 않으면 같은 상처를 반복하게 된다. 한 아이를 키워낸 엄마의 기록이자, 한국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왔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