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에게로 가는 시간-33년을 건너온 육아일기(교육 편)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2005년, 나는 사교육 시장의 공급자가 되었다. 남편의 실직으로 가정 경제를 홀로 책임져야 했기에 대학 입시학원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전업주부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기에, ‘가계의 위기를 너끈히 감당할 만한 능력이 되었다’라면 좋았겠지만 아니었다. 모래처럼 흩어진 경력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같이 추락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쌓아온 사회활동은, 심지어 정규직 근무 이력조차 경력의 맥을 잇지 못하는 너덜너덜한 조각들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내가 얼마나 허약한 상태로 사회에 내던져졌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정경제 파탄은 급박한 것이여서 자아 성찰 같은 낭만적인 내면의 싸움은 저 만치 밀려났다.
결국 선택지는 자영업뿐이었다. 그곳도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냉혹하고 정직한 정글이었다. 처음엔 동생이 하려던 학원을 우연히 우리부부가 인수하게 되었고, 남편과 같이 운영하려고 했으나 결국 혼자 그 길을 걷게 되었다. 남들은 삶의 안정권으로 접어든다는 불혹의 나이에, 나는 삶의 근간이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마이너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전문적으로 가르쳐본 경험은 전무했다. 하지만 글을 써서 돈을 벌어본 경험(프리랜서 구성작가 및 미방영 단편 드라마 집필 등)이 있으니, 말도 조리 있게 잘할 수 있다고 이상한 오해를 했다. 학창 시절 국어 성적이 좋았으니 언어영역을 맡는다면 내 인건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학교 1학년 교과서부터 차근차근, 그러나 빠르게 훑어 나갔다. 문학과 비문학으로 나누어 공부했고 고전문학도 다시 살폈다. 국어 문법은 과거에 배웠던 것과 상당히 달라져 있어 낯선 개념과 용어를 익히는 데 집중했다. 어느정도 공부를 마치고 언어영역 수학능력시험(수능) 문제를 풀면서 깜짝 놀랐다. 학력고사 세대인 내게 수능은 차원이 다른 문제 풀이 방식을 요구했다. 낯설었지만, 다행히 국어 공부라서 재미있었다.
지식을 갈구하는 공부가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서 하는 학습은 완전히 달랐다. 단순히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세련되고 기술적인 '출력'을 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자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독서가 입력이고 글쓰기가 출력이라는 것에 동의 한다면,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차이도 이와 같다.
가르친다는 것은 내가 이해한 지식을 상대방이 소화하기 쉽고 맛있게 가공하여 내놓는 일이었다.
실력은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빠르게 는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생존이 걸린 공부였기에 절박했고, 현장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오니 신경은 곤두섰지만 짜릿했다. 청중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투영된다는 점에서 방송과도 닮아 있었다. 다행히 나는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재능이었다.
먹고 살려고 시작한 공부였지만, 그 공부는 그 이후의 내 삶의 가치와 신념을 바꾸게 되었다. 나를 무너뜨릴 때처럼 나를 세우는 일도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여정이었다. 다만 나는 무너질 때처럼 일어서는 일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아마도 30대에 겪었던 직업적 방황이 맷집이 되어준 덕분에,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이 생소한 도전에 뛰어들 수 있었을 거였다.
학원은 네 번의 시험을 치르면 일 년이 지나가는 구조다. 1학기 중간·기말고사와 2학기 중간·기말고사, 그리고 고등학생에게는 전국 단위 성적 분포가 산출되는 3월, 5월, 9월 모의고사라는 중대한 시험이 추가된다. 2005년 당시에도 속도나 효율적인 면에서 공교육은 사교육을 당할 수 없었다. 사교육 시장은 누구보다 발빠르게 움직인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치른 주요 시험은 실시간으로 분석되었고, 시험을 마친 아이들이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문제 풀이와 오답 정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쌓인 기출 자료를 국어, 영어, 수학 과목별로, 그리고 학교별로 최소 10년 치 이상 보유하고 있었다. 사교육 시장은 정확하고 신속하며 철저했고, 무엇보다 치열했다. 나는 그 치열함 속에 나의 40대를 고스란히 바쳤다. 덕분에 우리 아이는 엄마가 원장으로 있는 학원에서 사교육비 걱정 없이 7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 학원은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대치동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대학 입시 전쟁의 최전선에서 원장으로 강사로 꼬박 8년을 보냈다. 밤 10시 이후 학원 운영을 금지하는 규제가 생겼을 때도, 시험 기간에는 새벽 2시까지 아이들과 함께했다. 돌이켜봐도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니었다. 아이들과 공부하고 성적을 올리고, 성적에 맞게 대학에 보내는 일이 신나고 보람있었다. 아이들이 원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규제로 막을 순 없었다. 그 아이들 중에는 내 아들도 있었기에 학생들에게 내 아이와 같은 정성을 쏟을 수 있었다. 학부모들과도 대부분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었다.
사교육의 여러 폐단(弊端)을 인정하더라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결국 사람을 성장시키는 일이기에 보람이 크다. 성적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하지 않다. 내신과 수능이라는 골대를 향해 공을 밀어 넣어야 하는, 확실한 결과물로 승부하는 일이여서 성취감도 따라온다. 골을 넣기 위한 과정 또한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의 성향에 맞춰 작전을 짜고, 유리한 과목을 정해 전략적으로 점수를 올려 수시와 정시로 나누어 승부를 걸었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어떠하든 받아들일 수 있게 마련이다. 학생과 부모, 그리고 나와 강사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걱정거리는 아이들 앞에 서는 순간 마법처럼 사라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나는 비로소 이 학원이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았음을 깨달았다. 나를 믿고 아이를 맡겨준 부모님들, 그리고 나보다 더 아이들을 애정해 준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덕분에 아들의 공식적인 공교육 12년을 무사히 마쳤다. 학원 선생님들과 아이들과 울고 웃던 시간이 아쉬웠지만 사교육 시장은 내게 이제 더 이상 매력을 발휘하지 못함을 직감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간신히 생존하고 나니, 그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사실은 보였지만 끝내 외면하고 싶었던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더는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서서히 삶의 방향을 틀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인생의 경로를 바꾸는 결정임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늘 그렇듯 내게는 시대를 바로 읽는 안목이 부족했고, 막상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정리되곤 하는 한 발짝씩 늦어지는 사람이었던 거다.
어느덧 젊다고만은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가정과 학원 사이에서 조금씩 지쳐갔고, 학원 생활의 끝자락에서 나는 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의 전반전을 마치고, 늦었지만 후반전을 준비해야 했다. 하프타임이었다. 후반전을 뛰기 위한 새로운 작전이 필요했고, 그 짧은 작전 타임이 내 남은 인생을 결정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확신이 동시에 들었다. 그 이후로 2년은 현장에서 빠지고 학원운영만 했다. 그것도 외국에 있으면서 원장으로 이름만 걸어 둔 상태였다.
나는 학원을 과감히 떠날 마음의 준비가 끝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나의 삶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혼과 임신, 출산을 겪은 30대에는 세속적인 성공과 직업적 성취에 목말랐고, 40대에는 생계를 위한 욕망을 현실로 구현하며 학원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그리고 늦었지만 인생후반전의 50대는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봉사의 현장에서 살게 된다. ‘어쩌다 봉사자’로 시작해서 ‘봉사는 중독이다’ 라는 말을 할때까지의 다시 10년의 세월이 앞에 놓여 있었다. 삶은 다시 나를 상상하지 못한 곳으로 인도했고, 나는 그 모든 순간의 희노애락을 온 몸과 마음으로 겪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