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나에게로 가는 시간 - 33년을 건너온 일기 (교육 편)
2002년 12월 17일 화요일
초등학교 3학년 일기
제목 : 교감 선생님한테 상장받은 것
나는 오늘 학교에서 방송시간에 교감선생님께 상을 받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방송시간에 상을 받은 것 처음이다. 지난 11월 18일에 수영시합을 하러 수원으로 갔었는데 접영과 자유형에 참가했다. 나는 접영 50M를 3등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동메달을 받았는데 그걸 학교에서 칭찬해 준 거다.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도 축하한다고 말씀하셨다.
* 아이의 일기가 더 솔직하고 당시의 분위기가 잘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2026년 2월 14일 토요일
아들을 수영장에 등록시키기 전, 나와 남편이 먼저 수영을 시작했다.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치려면 우리가 잘 배워두어야 한다는 명분과 실용성을 앞세운 운동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수영을 남편은 1년밖에 못했지만 나는 거의 10년 가까이하게 되었다. 아이를 핑계 삼아 시작한 운동이 힘든 시절을 견디게 해 주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수영을 하면서 헬스장에도 다녔다. 하루에 3시간 정도를 스포츠센터에서 살았던 시절이었다. 운동은 1시간이고 목욕과 사우나로 채운 날도 있었지만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평생 두고 잘한 일이다.
6세에 처음 수영을 시작(1998년) 한 건 건강하게 크라는 목적이었다. 나중에 아마추어 선수생활까지 이어지면서 자그마치 8년 동안 수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그 세월 동안 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수영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어느 날 좀 일찍 퇴근하면서 수영장으로 아이의 수영강습을 보려고 간 적이 있다. 이미 성인수영에서 만나 친해진 혜숙 씨가 먼저 와 있었다. 물론 다른 아이들의 엄마들도 아이들의 수영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혜숙 씨는 나를 보자마자 조용히 따라오라고 하더니 조심스럽게 이랬다.
“준영 엄마. 준영이만 아직도 작은 물에 있어. 같이 시작한 다른 애들은 다 큰 물로 갔는데.
엄마들이 수군거려. 좀 모자란 애 아니냐고. 난 아닌 줄 아니까 듣는 내가 좀 화가 났었어.”
혜숙씨는 살짝 분개하면서 진심으로 속상해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고마웠지만 '굳이 진급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감기 걸리지 않을 체력과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태평하게 대답했다. 운동은 운동이지 여기서 진급을 해야 한다고?
그래도 그날 저녁 준영이에게 물었다.
“넌 다른 친구들처럼 큰 물에 안 가도 괜찮아?”
“나는 동생들하고 노는 게 더 좋아.
”알았어. 그럼 됐어. “
그리고 며칠 후에
”엄마 나도 큰 물에 갈래 “
”왜? “
”친구들이 큰 물에서 같이 놀자고 초대했어 “
나는 수영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자세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몇 가지 테스트 후에 큰 물로 합류했다. 그렇게 수영에서 몇 번의 진급을 통해 결국 시작한 아이들과 같은 반에서 강습을 받았다.
수영에서 전환점이 찾아온 건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3학년이 되자 저학년 대회에 참여해서 다른 애들이 메달을 따기 시작했다. 어느 날 경기체고에서 대회가 있단다.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으니 준영이도 참석하라고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정말 참가만 했다. 당연히 우리 아이에게 메달은 없었다.
그런데 시합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뒷좌석에 앉아있는 아이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
”다른 애들은 동그란 목걸이 받는데 왜 나만 안 줘? “
하면서 우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빵 터졌다.
그걸 메달이라고 하는 건데 순위 안에 들어야 받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고, 메달을 갖고 싶은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경쟁이라는 걸 알게 된 계기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남편은 전투력이 발동됐다. 주말이면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갔다. 아들의 메달 획득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것이다. 거기엔 이미 다른 애들도 부모나 강사에게 수영지도를 받고 있었다. 역시 이런 거였다며 남편은 더 의지를 발휘했고, 시합이 잡히면 개인강사를 붙이라고까지 했다.
헐~~
경쟁심이 없는 아이로 속이 터졌던 남편의 이야기는 이렇다.
초등학교 1학년때 운동회를 참관했다.
달리기를 하는데 우리 아이는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 엄마 아빠가 자기를 보고 있고, 여러 어른들과 선생님들이 박수를 쳐주며 응원하는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적당히 달리면서 다른 친구들이 자기 옆을 지나쳐 달리면 하이파이브로 응원해 주고 친구들을 하나씩 앞으로 보내주었다. 결국 꼴찌로 들어오면서도 엄마 아빠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준영이는 그런 아이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존재 자체가 천사였다.
하지만 아빠는 속이 터졌다. 워낙 많은 형제자매들(자그마치 11남매) 가운데 살아남아야 했던 남편은 경쟁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가난한 시골에서 뭐든지 잘해야 인정받고 앞서야 뭐라도 하나 더 얻을 수 있던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나한테 볼멘소리로
”당신 준영이 가졌을 때 뭘 먹어서 애가 저래? “
앞 뒤 맥락 없이 훅 들어오는 비난에 나 또한 어안이 벙벙했지만 속 터지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수영 모임에 합류되었다. 시합이 주로 주말에 있었기 때문에 아빠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경기도배는 주로 성남시나 수원에서 대회가 열렸다. 가끔 전국대회가 있을 때면 새벽같이 잠실로 출동해서 응원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해야 했다. 우리는 어디든 몰려다녔다. 아빠들은 머리를 맞대고 군사작전을 짜듯 대진표를 보고 상대선수의 기량과 그동안의 전적을 분석했다. 엄마들은 평일 아침 성인반에서 수영강습을 받으면서 아이들 수영법을 알아서 지도했다. 부모 포함 30여 명이 한마음으로 아이들을 같이 키우고 시합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시합이 끝나면 순위와 상관없이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 아이들을 먹이고 어른들은 가벼운 술자리로 이어졌다.
”애들 수영 안 가르쳤으면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 라면서 즐거워했다.
그렇게 3년 정도의 시간을 같이했다. 아마추어지만 크고 작은 각종대회에서 개인별 단체별 메달을 휩쓸고 다닌 시절이었다. 전국대회에 나간 적도 몇 번 있었으나 메달은 없었다. 그냥 동네 스포츠센터의 취미반에서 아이들이 고만고만 잘했던 것이다.
수영을 같이하는 동안 겨울방학에는 가까운 스키장도 다녔다. 차로 30분이면 가기 때문에 부담이 없는 거리였다. 평일 아침 8시 스키장 도착하면 리프트를 기다리지 않고 스키를 탈 수 있었다. 오전 스키 3시간을 미친 듯이 즐기고 짐 챙겨서 돌아오면 점심은 동네에서 먹을 수 있었다. 알차고 알뜰했다. 여럿이 움직이니 가성비가 좋았다. 엄마들의 기동력과 부지런함에 나는 매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국 엄마들은 정말이지 교육자로서 최적화되어있었다. 그 실력으로 사회생활을 했어도 결코 남성들에게 뒤지지 않을 능력들을 장착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신나서 잘 따라다녔다.
6학년이 되자 수영반 아이들은 경기체고의 하계훈련과 동계훈련에 참석했다.
준영이는 동계훈련에 참석해 보더니 수영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중학생을 앞둔 새해였다. 우리는 당연히 ”알았어 “였다. 우리 아이의 수영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당시 나는 프리랜서를 전전하면서 불안해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프리랜서가 직업 선택지로 인정되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육아를 해야 하는 여성이 직장을 다니는 건 당당함이 아니라 남편 벌이가 변변치 않을 거란 인식도 팽배했었다. 그러니 정규직도 아닌 프리랜서 직업여성은 자기 계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팔자가 드센 여자 거나 좋게 봐줘야 ‘딴 주머니를 차려고 (용돈이나 벌자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구나’였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발이 허공에 떠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평범한 가정의 여성으로 보통의 안정감을 가지고 살았어야 했지만 내면으로는 사회에 뿌리내리고 싶은 욕망으로 부유(浮游)했다.
그 와중에 지금 생각해도 잘한 건 백화점과 손절하고 운동으로 눈을 돌려서 내적 불안을 이겨낸 것이다. 안전에 지불하는 비용만큼 운동에 지불하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걸 그때 배웠다. 아이의 기초 체력을 위해 시작했지만 건강한 방법으로 나를 잡아주었다. 프리랜서로 불안정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엄마로서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발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던 그 시절, 운동은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었다.
그리고 수영 모임은 내게 공동체를 선물했다. 전업주부지만 아이를 키우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여성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아이들의 메달을 응원하면서, 사실은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고 다른 입장의 삶도 들여다보았다. 무엇보다 운동이 습관으로 내 삶에 자리잡았다. 서로를 응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동은 돈 있고 시간 있다고 누구나 꾸준히 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성공한 소비는 이런 것이다.
지금은 평일에 걸어서 출근한다. 따로 운동시간을 빼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체력도 안된다. 그래서 왕복 1시간 20분 출퇴근 거리를 걷는 걸로 운동을 대신한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꾸준히 산에 오른다. 등산의 개념은 아니고 둘레길을 걷는 느낌이다. 나이가 먹으면서 걷기를 택한 건 아직까지는 좋은 선택인 듯 하다. 걷기는 내게 좋은 운동이자, 쉼이자, 자연과 교감하는 행복한 시간이다. 이제 나는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