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연애, 결혼생활의 합이 올해로 12년 차. 헬스장 갈 거라는 말은 매년 듣는 새해 결심. 남편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그야말로 연중행사다. 이제는 남편의 ‘앞으로 운동 좀 다니려고’라는 말을 들으면 기대감이 차오르기보다 ‘그래그래, 언제일지 모르지만 꼭 가길 바란다’라고 생각하고 만다. 그나마 올해 들어서는 저녁에 먹는 맥주 한 캔과 탄산음료를 끊으니 몇 달 새 운동 없이 4kg을 감량하더라. 몸이 변하니 마음가짐이 달라지나? 단지 내 헬스장에 다니겠다네? 하지만 그날은 또 언제쯤 오는 걸까?
남편의 결심을 기대하며 듣지 않는 데는 나름대로 그가 내게 보여준 모습들의 전적 때문이다. 올해 초에 내가 먼저 체험해 보고 좋아서 남편을 데리고 원적외선 찜질방에 갔었다. 원적외선으로 뻘뻘 땀 흘리며 피로도 풀고 다이어트 효과까지 있다는 곳이었다. 힘든 점은 1도 없었다. 한 번 체험해 본 남편이 해 볼만하다기에 20회를 끊어줬는데 한 번 다녀온 후 다시 걸음 하지 않았다. 여자들만 가득한 곳이라 쉽게 걸음 하게 안 된다니 물론 이유가 이해는 간다. 그래서 다시 가보라고 채근하지는 않았다. 남은 건 내가 쓰면 땡큐니까. 그리고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은 몇 년 전부터 바리스타자격증을 따볼까 라는 말을 여러 차례 던졌다. 나는 남편이 뭐든 재밌게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 있기를 언제나 기대했기 때문에 두 손, 두 발 들어 진심으로 찬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아직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다.
이렇듯 취미생활이 특별히 없는 남편의 관심은 오로지 딸에게만 향해 있다. 아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본인 스스로 좋아서 육아를 도맡다시피 하면서 나보다 더 엄마같이 행동하던 사람.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고 어느덧 2학년이 되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많이 줄었다. 자식이 독립하고 나면 엄마들은 얼마간 마음이 허전해진다고 하는데 내 남편도 어쩌면 지금 그 시기를 지나고 있어서 마음이 조금 허전해진 걸지도. 사십춘기에 겪는 약간의 우울감은 거기에서도 기인한 걸까? 그렇다면 그 허전한 마음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야지.
아무튼 우리 남편, 최근의 몸무게 감량으로 그래도 작년보다 가벼워진 몸이 내심 마음에 들긴 한가 보다. 뱃살도 좀 들어갔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처럼 아침, 저녁으로 체중계에 올라가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역시 뭐든지 스스로 그 변화를 경험하고 느끼는 바가 중요한 법. 그 섬세한 터닝포인트가 우리의 인생을 참 많이 변화시키지.
남편이 가벼움을 즐기는 동안, 나는 자칭 변화디렉터로서 내 남편이 조금씩 변화해 갈 미래를 상상하며 뿌듯함을 누릴 준비를 한다. ‘이제 미션을 줄 때가 되었다!’
“오빠, 첫 번째 미션이야. 사우나에 가서 세신 받고 오기!”
“오늘은 귀찮은데, 내일 가면 안 될까?”라고 한다.
나랑 금방 약속해 놓고 시치미 떼기 있냐... 최대한 차분하고 강력한 어조로 말한다.
“아니, 지금 다녀오면 좋겠어. 시간 있을 때 떠오르는 것들을 바로 해야지. 미루면 또 언제까지고 미뤄질 거야. 그리고 내가 오빠에게 제안하는 건 옵션이 아니라 미션이야. 내가 이끄는 대로 믿고 따라와 봐. 일단 하고 나서 어땠는지 말해줘.”
나는 남편을 끝끝내 동네 사우나에 밀어 넣었다. 이로써 ‘사십춘기 남편의 힐링미션’이 시작되었다!
나는 기다리는 내내 흥분되고 흐뭇한 마음이었다. 남편의 가벼워진 몸은 지금 더 슬림해지는 중이다 상상하며. 더불어 남편의 뇌 속에서 새로운 영역이 활성화되고 있겠지 상상하며.
두 시간여쯤 지나서 남편이 돌아왔다. 어땠어? 물으니 때를 뽀득뽀득 밀고 나니 일단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단다. 오랜만에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니 적은 돈을 썼지만 케어받는 느낌이 드는 것도 좋았고, 요즘 날씨가 참 습해서 목욕을 하루에 두 번 세 번씩 하고도 완벽하게 시원한 것 같지 않았는데 세신사의 손길 한 번에 평소와는 다른 차원의 개운함이 좋다고 했다. 거봐, 내가 말하는 대로 하고 나면 기분 좋을 거라고 했잖아.
내가 제안한 최초의 미션에 만족한 남편은 금방 변화하기 시작했다. 첫 단추를 잘 꿰었나 보다. 다음에 내가 제안해줬으면 하는 ‘힐링미션’으로는 아이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놀고 있을 때 혼자서 영화도 한 편 보고 올까 싶고, 프라모델도 조립해보고 싶고, 레고도 하나 사서 해보고 싶단다.
난 정말 작은 물꼬를 하나 텄을 뿐인데 벌써부터 효과가?
스스로 취미를 찾겠다고 말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무척 신나 보였다. 덩달아서 앞으로 내가 더 많은 일들에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자 결심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남편이 보여준 작지만 의미 있는 마음의 변화 덕분에 대화하는 시간이 벌써부터 제법 화기애애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사십춘기 남편’과는 영영 작별을 고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