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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화디렉터 Jun 27. 2023

예민함 만렙 사십춘기 남편

지금부터 내가 제안하는 미션을 무조건 수행한다고 약속해!

서른 살에 딸을 낳았다. 아들을 꿈꿨던 적은 임신 사실을 알기 이전부터의 시간을 통틀어 단 1초도 없었다. 여자끼리만 복닥거리던 집에서 나의 사춘기를 보내서 그런가. 내게 남자라는 성별을 가진 아들이 생긴다는 건 애당초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만큼 남자라는 존재는 내게 낯설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언제나 그 부분이 발에 채였다. 나는 아빠벌인 팀장님이나 부장님께 어떻게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할지 매번 무척이나 망설였다. 내게 아빠가 있었다면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지 전혀 상상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빠를, 심지어 오빠나 남동생을 경험해 본 적조차 없는 내게 이해해야 할 아들이 하나 생겼다.      


나이를 사십이나 먹은 아들. 사람들이 흔히 사십춘기 남편이라 부르는 아들.     




조리원에 있을 때 친해진 동기들 중에서는 내가 막내였다. 그래서 내가 서른 일 때 이미 마흔을 바라보는 언니들과 형부들이 있었다. 언젠가 언니들이 한 말을 나는 내심 마음속에 염두해두고 있기는 했다. 남자들이 마흔 살쯤 되면 사십춘기가 온다던 말. 여자로 따지면 흡사 갱년기처럼 남자들도 우울증을 겪는 일이 는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라면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올라 있을 텐데 거기에 수반되는 알 수 없는 헛헛함도 있을 것 같고, 완전히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더불어 느낄 만한 시기가 아닐까 싶었다. 한 언니는 남편의 우울감을 낮추기 위해 상담을 받아보게 할까 싶다했다.     




사십이라는 나이, 많이 흔들리는 시기인가 보다. 흔들리며 성장통을 겪는 나이가 사춘기나 2N 살에만 출현하는 줄 알았더니 4N 살에도 찾아온다는 사실을 몸소 겪으면서야 비로소 이해하는 중이다. 사실 삶의 어느 한 굽이라도 완벽하기만 한 때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아무튼 나와 같이 사는 남자가 지금 만 사십이다.       


사십춘기의 남편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 짜증이 좀 늘긴 했다. 그냥 지나가도 될 법한 상황에 욱 한다. 내가 하는 조언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요즘 남편과 대화를 나눌 때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말을 또 곡해해서 들었을까 하고. 회사일도 재미가 떨어진다고 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무척이나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고 성과에 흥분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다른 길을 자꾸 모색하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일이 그냥 재미없다기보다 지쳐있고 그래서 탈출하고 싶은가 보다.      




사춘기 남학생의 마흔 살 버전이 내 남편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화내고 싸워서는 이 아이(?)를 더 비뚤어지게 만드는 것일 테니 나도 전략의 변화가 필요했다.

     

남편과의 대화가 자꾸만 반대로 어긋나 달려가던 그 시점에 글쓰기 모임을 통해 얻어낸 인사이트. 내 남편이 기분 좋은 것들을 경험하게 하자! 이름하며 '내 남편의 힐링미션'   




채찍과 잔소리 대신 당근을 쓰자는 작전인데 아무리 마음껏 놀고 오라고 해도, 쉬고 오라고 해도 영화 한 편조차 혼자 보러 가지 않는 남편에게 의무적으로 미션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물론 남편의 동의를 우선적으로 구할 것이고. 이런 생각은 바로 며칠 전 참여했던 글쓰기 모임을 다녀오는 길에 운전을 하며 즉흥적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바로 생각을 다듬었고 남편이 퇴근해서 오자마자 내가 제안하는 것을 해보겠냐고 물었다. 어떤 일에든 약간의 신중함을 발휘하는 그는 당연히 또 망설였다. 그래서 내가 오늘 이런 얘기들을 들었다고 들려주었다.




그날, 남편에 대한 글을 쓰신 분이 두 분 있었다. 한 분은 자신의 남편을 ‘OO동 3년 연속 최고로 행복한 남편 1위’라고 부른단다. 약간의 비아냥을 보태어 쓰기 시작한 말이기는 했지만 묘하게 애정이 가고 부를 때마다 서로 더 즐거워졌단다. 남편은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면서도 겨우 두어 시간 쪽잠을 자고 낚싯배를 타러 신나게 달려 나간단다. 낚시뿐만 아니라 본인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즐기며 사는데 그런 모습을 보며 괜스레 자신도 행복해진다고 했다.      


또 한 분은 60대라 남편분도 퇴직을 하신 지 좀 되었는데 코로나 기간 동안은 집에서 부인만 바라보고 살았다고 한다. 활동적인 부인이 모임이 있어서 나가면 자신은 버려두고 나간다고, 산책은 왜 함께 안 해주냐며 짜증을 내셨단다. 그런 분에게 기관에서 운영하는 명리학 강좌에 대신 등록을 해주고 등 떠밀다시피 보냈는데, 수업에 가보니 남자는 자신 혼자뿐이라고 했단다. 하지만 일단 들어보니 매우 재밌었기 때문에 다른 인문학 강좌들도 직접 추가 신청을 하고 오셨단다. 지금은 집에서 틈나면 유튜브로 클래식 음악을 찾아서 감상하고 미술가들에 대해서 찾아본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예술을 접하고 논하고, 또 무엇보다 이제야 남편에게서 해방되어 글쓰기 모임에도 올 수 있게 되어 좋다고 말씀하셨다.     




들으면서 기분이 참 좋았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만 한 남편이 조금 안쓰러워짐과 동시에 내 남편도 행복한 남편 어워드에 이름을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서로 긍정적인 어휘들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바랐다. 짜증 섞인 어휘를 섞지 않고.


어찌 됐든 내 얘기를 들은 남편은 처음에는 내가 부여하고자 하는 미션들이 귀찮은지 나중에 하겠다고 또 한 번 미룬다. 하지만 나의 강력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에 슬그머니 완벽하게 내키진 않아도 알겠다며 대답한다. 그리하여 ‘내 남편의 힐링미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어떤 현상을 이름 붙이기 시작하면 그 뜻을 고민하게 되니까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그냥 ‘왜 이렇게 짜증이 늘었지?’, ‘왜 자꾸 예민하게 굴어?’라고 말할 땐 몰랐는데 ‘사십춘기가 와서 그런 거구나'라고 이름 붙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게 되더라. 이 기회를 통해 내 남편도 ‘행복한 남편 어워드’에 이름 올려볼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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