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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Dec 04. 2017

여성의 신체는 권력이 될 수 있는가

금요일에 페이스북 피드를 넘기면서 이 글을 보고 속이 상해서 폭음을 했다.

 

해당 댓글에서 이희은이 "나처럼 예쁘게 태어난 여자 질투하지 마세요" 나 "못생겨서 저런다" 같은 말은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는데도 그녀가 "외모주의 통념"을 뒤에 업은 "다수자"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통념에 부합하는 몸' 때문이다. 그 “인기 많은 몸”은 “다수를 지배하는 통념” 속에서 “남성의 시선으로 구축된 외모주의의 힘”, 무려 “너무나 강력해서 모두를 순응하게 하거나 타협하게 만들 수 있는 힘”으로 기능하고, 그 몸을 가진 이희은은 그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는 부분 때문에 같이 술을 마시던 사람한테 설명하다가 눈물까지 나와 버렸다. 남성들이 그런 말을 했을 때도 속상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긴 했다. 적어도 가부장주의 하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왔는데도, 그런 문장들을 읽으니 더 속이 상했던 것 같다. 여성의 신체가 “강력한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여성들 자신까지 하게 된다는 게 슬프기도 했고.


사실 남성들의 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서민 교수가 여성신문에 기고한 칼럼 <페미니즘이 싫다는 젊은 누이께>에는 익숙하지만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문장이 등장했다. 페미니즘이 싫다는 여성, 닉네임 ‘승기야’ 님이 여성억압적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서민 교수는 이렇게 정의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승기야님이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지금이야 승기야님은 뭇 남성들이 떠받드는 젊은 여성이니까요.”


‘젊은 여성’에게 ‘뭇 남성들이 떠받드는’ 상황이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 쉽게 재단된 착각이다.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와 무관하게 ‘젊은’, 더욱이 ‘성차별적 미디어가 사랑하는 형태의’ 신체는 필연적으로 자원화된다. 남성/남성중심적 사회는 자원이기 때문에 그 신체를 열망하고, 신체의 주인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이 언제 어디서건 다양한 형태로 팔려나가는 것을 목도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자원으로 해서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권력인 듯 권력 아닌 권력 같은 ‘그것’은 실제로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더 많이 앗아간다.


그러나 저 착각에 ‘뭇 남성들’은 더 쉽게 빠져든다. 우에노 치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적극적 성노동은 물론 아니겠으나) 성 구매자가 성 판매자를 증오하고, 성 판매자가 성 구매자를 경멸하게 되는 메커니즘이다. 여성으로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분열적 삶을 점지당한 사람들과, 그 분열적 영혼이 아닌 오직 신체만을 열망하는 사람들.


최근 손아람 작가가 일군의 페미니스트에게 비판받은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여성들이 분개했던 이유는 이 메커니즘이 무척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손아람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는 바가 아니다. 손아람 작가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차별비용’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로 남성 페미니스트가 남성 일반을 향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도 그 이야기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여성’인 나에게 이토록 상냥하고, 타자에게 ‘여성’으로서 열망 받았던 기억이 낭만적으로 서술되어 있을 때 여성들은 분개한다. 그 열망은 여성들에게 결코 행복한 기억도 아니며, 권력도 아니고, 타자를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힘도 아니기 때문이다. 손아람 작가가 그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썼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렇게 서술하면서 여성들이 태생적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의 언어를 빌리자면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적 통념”이다.


내가 여자였다면 지금과 달리 다들 나에게 잘 해주겠지?

내가 여자였다면 이렇게 힘든 일 안 해도 되겠지?

내가 여자였다면 지금과 달리 날 열망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겠지?

그런 온갖 열망들이 결합해서 ‘보슬아치’니 ‘김치년’ 같은 단어가 되었다.


‘권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권력을 타자를 규율하고 자신이 뜻한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타자의 목숨까지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왕에게는 권력이 있다. 정부에게도 권력이 있고, 사법기구에게도 권력이 있다. 대통령에게도 권력이 있다. 해고라는 것을 토대로, 혹은 취업규칙 같은 규율을 통해서 노동자의 행동을 규제할 수 있는 자본가에게는 권력이 있다. 타자의 말을 마음대로 규율할 수 있는 잡지의 편집주간에게는 권력이 있다. 민중에게는 자신의 삶과 자신을 대의하겠다고 나선 자의 정치적 행동을 규율할 수 있는 권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규정된’ 여성의 신체 역시 권력인가?


가부장주의의, 혹은 자본주의의 시선에 잘 들어맞는 몸이 때로 권력적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의 신체를 욕망하기에 때로 남성/사회는 여성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그 권력적 순간은 지극히 찰나이며, 실제로 여성의 신체는 소비재로 기능한다. 신체와 인간은 분리될 수 없으나 구조는 그것을 분리해서 소비하고야 만다. 그 과정 속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처입는다.


물론 어떤 여성들이 실제로 남성/사회에서 욕망받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소위 말하는 ‘여왕벌’의 스탠드에 서서 가부장주의의 꿀을 빨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살면서 만날 때가 있고, 때로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여성들에게 그것이 권력일 수 있을까. 이미 수많은 여성들은 그 짧은 권력적 순간이 창출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에 타자의 기준에 들어맞는 가상의 완전함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실질적 권력이 절대로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공격해선 안 된다. 이는 가부장주의와 끊임없이 교섭하고 길항하는 여성들의 삶이다. (나는 이희은 씨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확언할 수는 없으나) 남성에게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가질 수 있는 권력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성이 있다면 이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제공해야 할 것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여성의 삶을 망치므로 너는 반페미니스트다’가 아니라,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남성/사회의 시선에 스스로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너의 삶은 망가지지 않는다’여야 한다. 최소한 ‘망가지지 않는 너의 삶을 위해 나/우리가 함께 노력할 것이다’여야 한다.


돌이켜보면 반드시 남자들만 여성의 자원적 신체를 권력으로 치부했던 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났다. 2000년대 중반에 종종 들어가던 어떤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 셀피를 자주 올리던 한 여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받은 사건이 있었다. 그 여성의 외모가 사회통념적으로 아름답다고 평가받을만한 것이기에 권력적이라는 이의제기였다. 그녀의 셀피를 자주 보아야만 하는 다른 여성들에게 루키즘으로 작동할 수 있고, 박탈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셀피를 그렇게 올리지 말라고 했다.


그 셀피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신체를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에서 자유롭기를 개인에게 어디까지 요청할 수 있느나였다. 물론 페미니스트로서의 우리는 자유롭기 위한 시도를 의식적으로 반복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안팎에서 서로 고무할 필요도 있다. 페미니즘 내부에서 더 자유로워지기 위한 ‘미적 액티비티’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액티비티의 가능성과 별개로 지금 자유롭지 못한 자에게 우리는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실제로 당시 셀피를 올리던 여성은 그렇게 가부장주의의 시선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옷차림이나 구도를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체 자체가 ‘가부장주의’로 해석되었다. 이 경우 가부장주의적 시선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은 어느 쪽인가? 타인의 신체를 나의 액티비티의 대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윤리적인가? 무엇보다도 그 운동은 ‘사회적 통념’을 부수는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이미 그 운동 자체가 가부장주의에 포섭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시에는 어렴풋하게 느끼던 불편함을 나는 이제 좀 더 명확하게 토로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가능성이지, 그 가능성의 제약은 아니다. 더 많은 가능성이 주어질 수 있다면 우리의 자매들은 대체로 바깥의 선택을 지지할 것이다. 그 경계가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반동적’이라고 여겨지는 외적 선택을 하는 여성들도 통념으로만 판단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남성들이 여성의 신체를 너무 쉽게 자원으로 환치한다는 이야기를 나 빼고 모두 남성인 술자리에서 토로했더니 “얼마나 남성들이 여성의 신체를 강렬하게 희구하는지 몰라서 그걸 ‘쉽다’고 정의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 역시 살면서 수많은 ‘자원화’를 겪었고, 공포스럽게 느껴왔기에 그 점에 대해서는 알만큼 안다고 생각해 왔는데, 글쎄. 내가 남성이 아니니 남성의 언어로 설명하면 또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지금껏 나는 남성의 언어로 그 희구에 대한 이야기들도 적지 않게 들었다.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는 형태로 만난 적은 별로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구조에 문제의식을 가진 남성들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도 좋다고 본다.


++) 이희은의 해당 사진은 상품 상세컷이었다. 아마 어떤 경우 이런 상품을 판매하는 것조차 성차별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텐데, 이것이 그녀의 미적 활동이 아니라 상품이었다는 점에서 또 다르게 판단할 여지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 근데 나 옛날에도 이 분 옹호했다가 욕 먹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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