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ie Jeong Jul 03. 2023

어느 새부터 홍보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말하지 않으면 중간은 간다

최근에 '뭐하세요?' 라는 얘길 들으면, 저 홍보해요! 라고 말하는 빈도가 현격히 줄었다. 아니 거의 없다. 최근에 한 행사장에서도 '안녕하세요 000(회사이름) 정인혜입니다' 라고 아주 짧게 소개하고 말았다. 강단 아래서 '저 좋은 회사에서 쟤는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툭 떨어진 뭐하는 사람?' 하는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가득했지만 따로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고 나의 업이라 생각하던 홍보를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게 된 걸까. 요즘 나는 극도로 똑똑한 사람들이 결국 홍보를 바보같아 보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퀸메이커 보면서 적었던 글

실제로 최근에 '기자에게 진행시켜'하면 기사가 뚝딱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현실은 그러지 못하다는 데에 상실감을 조금 느꼈다. 누구에게 탑다운해서 일을 시키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는 무수한 자료 더미에 허덕이는 기자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픽되기 위해, 점점 더 단순화된, 효율적인 형태로 보도자료를 적고 검토요청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반추해보았기 때문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사실은 이렇게 일을 해야 기자분들도 기사를 검토하기 용이해지고, 내가 맡은 업무를 충실히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이 행위가 가지고 오는 예상치 못한 결과도 있기 마련인데, 어쨌든 필터링된 자료와 숫자로 보여지는 홍보인의 모습은 '저 사람은 좋은 것만 알고 나쁜 건 온몸으로 막는 회사의 충실한 앵무새'로 보인다는 것이다. 말이 쫌 쎈가? 하지만 그렇게 여겨서 '홍보는 제끼고 심사역, 전략팀, 아니 대표 나와'를 요구하는 상황이 왕왕 있었다.


최근에 몇 차례 회사를 대변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안 들어도 될 말을 들으며, 기자뿐만 아니라 기업의 어떤 사람을 만나도 '아 홍보는 좀...'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 주눅들 때가 있었다. 그 시기 즈음 "홍보랑 대관은 회사 입장서 좋은 얘기하고 가서 조아리는 총알받이 같은 팀 아니에요?" 라고 말하는 사람의 발언을 듣고 '와! 뇌가 입밖으로 바로 튀어나올 수도 있구나! 정말 못됐다!' 라고 생각 하기도 했고, 이직을 고민하는 몇몇 기자들이 "아 근데 홍보는 좀 안 멋져..가서 조아려야 하잖아" 라고 하는 이야길 듣고 또 속으로 '음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 보는구나' 라고 또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홍보하는 사람들만큼 눈치 빠르고 프레임을 교묘하게 뒤엎는 것을 잘하는 것도 못봤다. 숫자로 딱 떨어지지 않는 이 일이 내가 좋았던 이유는, 불리한 판세가 아주 약간의 앵글로 쓰나미처럼 판이 뒤바뀌는 형태에서 오는 희열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과 인식의 흐름을 끊임없이 같은 메시지를 주입시켰을 때 오는 결과값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딴에는 내가 가진 아주 작은 영향력으로 내가,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 더 멋져보이길 바랬다!


그래서 이번 상반기 동안은 나에게 진하게 남은 홍보라는 향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회사를 대표해야 하는 발언에 대해서 내 주관과 직관은 지우기로 했다. 여전히 '그건 잘 안될 거야' 아니면 '와 그건 엄청 잘 될거야!'라는 말이 습관적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게 된다. 3가지의 근거가 머리에서 바로 정리되지 않으면 그냥 말을 안하기로 했다.


또 처음 시작한 것 처럼...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홍보,대관,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을 안쓰기로 했다. '저는 어디의 누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로 상대방이 호기심과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기로 했다.또 어떻게 보여야하는지 프레임짜는 거 하면 우리가 전문 아닙니까. 최근에 책에서 봤는데 단순함을 무기로 삼아야 전략의 방향과 실행에 집중하는 도달점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냥 내가 뭘 하는 누군지 말 안하고 얻을 수 있는 게 사실은 더 많을 수 있다는 거다.


얼마 전 만난 누군가 이제는 스페셜리티를 가질 법하니까, 스타트업PR로 책을 내자고 했는데 우스갯소리고 "아 그건 탄소중립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싫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무수한 전문가들이 책을 쓰고 냈다. 표현방식만 다를 뿐 그들과 내가 가고자하는 지향점은 같고, 훌륭한 이야기는 이미 그분들의 손으로 다 쓰여졌기 때문에 내가 책 한 권 더 낸다고 자아실현 외에 뭐가 더 달라질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근데 더 중요한 건 스타트업, PR 같은 나한테 익숙하고 사람들이 나 하면 떠올리는 단어로 책을 쓰기 싫은 것도 있었다. 그 프레임에 갇히면 영원히 그 프레임 안에서 전문가로 활약(사실은 전문가도 아닌데) 해야 할까봐 두려운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내가 새로 프레임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도 좀 있다.


쓰다보니 '뭘 안하겠다'는 다짐만 계속 한 것 같은데 어떤 일에 있어서 침묵은, 못해도 중간은 간다. 어떠한 확신이 서기 전까지, 홍보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더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전까지는 그냥 직급도 하는 일도 소개하지 않는 무형의 상태로 하반기까지 보내보려고 한다. 썩 내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지만, 좀 여론의 생각을 읽고 manifulate할 수 있는 전략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잘안다. 그러니까 결국 나만 잘 하면 됨. 그니까 우리 홍보하는 사람들, 다  주도적으로 프레임을 짜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