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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Jun 04. 2021

여행이 여행자를 만든다

세상의 용도 / 니콜라 부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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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행은 그냥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곧 증명해주리라. 

여행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터는 여행이 여행자를 만들고 여행자를 해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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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능동적으로 시작되지만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떠남을 결심하고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의지는 여정을 이끌지 못한다. 

여행은 바람과 비와 사람과 냄새 속으로 여행자를 데려간다.


여행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다. 


누군가의 긴 여행이 한 제국의 생각을 바꿀 작은 힘이 되었고, 한 문명은 여행자들의 발과 입을 타고 대륙을 넘고 대양을 건넜다. 그들이 전해준 것은 바로 세상의 용도가 되어 낯선 땅의 삶 속에 파고들었을 테다.


 “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문장으로 니콜라 부비에는 여행기를 시작한다. 그는1953년 6월 학위논문을 끝내고 결과도 확인하지 않고 제네바를 떠난다. 친구 티에리 베르네와 함께 피아트 토폴리노를 타고 인도로 향하지만 1년 6개월 후 그의 여행은 파키스탄의 카이바르 고개에서 혼자 끝난다.


동유럽과 터키와 투르크 족들의 땅과 이란과 아프카니스탄으로 이어진 그의 여정이 지도로 꼼꼼하게 담겨있는 고마운 편집 덕분에 독서가 즐거웠다. 요즘의 분위기 있는 사진들이나 화려한 편집의 여행기와는 비교불가. 칠백 페이지에 가까운, 목침같이 투박한 이 책은 무겁지 않다. 여행자가 만나는 곳의 새로운 사람들이 그려가는 몇 편의 소설 같은 여행기다. 길 위의 통찰은 긴 이야기들과 어우러져 깊고 단단하다.


코로나는 떠나고 싶었던 이들을 주저앉게 만들었지만 우리에게 여행의 기다림은 더 진해졌으니 책으로 여행의 장소를 옮겨봐도 좋지 않을까. 책 속의 문장들 사이를 여행하며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 보는 것도 좋다. 낯선 땅에 낯선 시간은 지금의 나를 낯설게 만들고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신비가 있다. 우물 밖은 드넓고 화려한 삶이 아니다. 현실에 갇혀 있던 나를 벗어나는 순간 황야를 걸을 용기가 준비되는 것일테니.


반 세기도 전에 쓰여진 여행기다. 


<세상의 용도> 속에 지나간 땅의 사람들은 거칠은 역사를 통과했다. 

실크로드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읽는 동안 걱정을 했다. 


요즘 여행기들은 너무 화려하다. 

향수냄새도 느껴지는 듯한 그들의 사진을 보면 왜 여행을 가는지 묻고 싶다. 이 책 속, 먹물 하나로 그려진 친구 티에리 베르네의 그림은 인스타 따위가 따라올 수가 없다. 

여행의 기록은 스마트 폰이 아닌 여행자의 가슴에 새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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