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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백수 Jun 14. 2019

영 번째 슛: 프롤로그

백호에게 백수가, 연재합니다

몇해 전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어느 출판사의 편집자분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제게 새 책을 제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합정동의 한 중국집에서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편집자분이 물으셨습니다.


"선생님, 최근에 서점은 자주 가세요?"

"그럼요. 어떤 게 나오는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그럼 최근에 '빨강머리 앤'이나 '보노보노'에 관한 에세이들 나온 거 보셨어요?"

"네, 요즘 잘 나가잖아요."

"제가 제안드리고 싶은 게 그런 겁니다."

"2차 텍스트요? 무엇에 관한 것 말씀이시지요?"

"그냥 선생님께서 가장 감명깊게 본 책도 좋고 만화도 좋고 뭐든 좋습니다. 직접 정해주시면 됩니다.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


책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은 가장 자주 접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나는 어떤 때는 유하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이야기했고, 또 어떤 때는 멜빌의 '모비딕'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생각한 건 정말 감명깊게 읽은 책이 아니라 적당한 대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몇 달을 붙잡고 쓸 책의 소재를 정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자 스스로에게 솔직한 대답을 요구하게 되더군요. 의외로 고민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슬램덩크. 슬램덩크네요."



아홉 살, 고등학생이었던 사촌누나가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만난 슬램덩크야 말로 그 어떤 고전보다 나를 강렬하게 뒤흔든 '정전'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었습니다. 인생에 어떤 의문이 생기더라도, 어떤 곤란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슬램덩크는 괜찮은 처방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때로는 정답을 알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치열한 경기장면으로 고민을 잊게 해 주기도 하며. 백호에게 소연이가 처음 "바스켓 좋아하세요?"하고 묻는 장면부터, 마지막 경기의 그 마지막에 "정말 좋아합니다."라고 백호가 소연이에게 답하는 장면까지, 정말이지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슬램덩크가 보물같은 책인 이유는 거의 모든 화에 기억할만한 장면이나 대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백호와, 북산의 문제아군단과, 그 외 다른 학교들의 열혈 바스켓 선수들은 차라리 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멋진 말들을 건넵니다. 그것들을 추려 각각을 테마로 잡고 에세이를 써 본다면 어렵지 않으면서도 즐거운 작업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편집자님,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님께서 그림이나 대사를 사용하도록 잘 허가해주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괜찮을까요?"

"아유, 작가님은 걱정 마세요. 그런 게 저희 일인데요."


저는 편집자님의 말씀에 신이 났고,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믿음직했던 편집자님은 퇴사를 하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새로운 편집자님과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원고 작업이 90%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저는 새 편집자님께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작가님, 죄송합니다.. 이노우에 작가님께 인용 허락을 받지 못해서 책이 못 나올 것 같습니다.."


제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어느덧 만삭에 이르러 세상을 빛을 보기 직전에 저의 글들은 뱃속에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니까요. 그 허탈감은 몇 달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해야겠는데 도무지 누구가 그 대상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 편집자도, 출판사도, 이노우에상도 원망하자면 한 없었지만 또 이해하자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만에 내린 저의 결론은 그냥 원망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냥 다 괜찮아서, 홧김에 내팽개쳐둔 원고들을 다시 주워들었습니다. 비록 책으로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백호를 바라보며 바란 제가 백호를 향해 던지는 이야기들을 이대로 묻어두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그 이야기들을 풀어두고자 합니다.


서른 세 살 시인/가수 강백수가

열 일곱 살 바스켓맨 강백호에게

건네는 이야기들,


가급적 매주 화/목/토 요일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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