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은 사소하다
“바스켓, 좋아하세요?”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된 것은 고작 그 한마디였다. 사실 소연이가 백호에게 그 말을 건넨 것도 그의 소질을 파악했다거나 앞으로의 미래를 예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백호의 키가 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누군가 내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을 때 “어느날 비틀즈의 음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파도처럼 다가온 그 감동에 터져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의 운명을 직감했습니다. 아, 나는 음악에 인생을 걸어야겠다.” 라거나 “음악은 전 인류가 공통적으로 사랑하는 예술입니다. 이념, 인종, 종교 등 여러 가지 갈등으로 분열된 세계 인류를 음악을 통해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와 같은 거창한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조차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전혀 믿지 않는다. 노래 가사를 통해 밝힌 바 있지만 내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친구가 꼬드겨서’였다. 열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절망으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환희로 솟구치게 하기도 했던 음악을 만난 계기가 고작 친구의 꾐일 뿐이었던 것이다. 인생이 이토록 사소하게 결정되어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또 사소하지 않은 이유로 시작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 음악을 하게 된 것은 엄마가 선물한 기타 때문이었고, 호날두는 가난해서 흙장난만 하고 놀다가 우연히 차 본 공의 촉감을 못 잊어 축구선수가 됐다. 승려가 되려고 절에 들어갔던 김동리가 소설가가 된 것은 가부좌가 안 틀어져서였다는데.
어쩌면 우리 삶은 그 시작부터가 아주 사소한 계기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난 이유도 마찬가지겠지. 1985년 어느 날 지방으로 출장을 간 한 남자가 거기에 살던 한 여자를 만났다. 남자가 보기에 여자가 예뻤고, 여자가 보기에도 남자가 근사했겠지. 그냥 그 뿐일거다. 모든 만남의 이유는 다 그런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태어나잖아.
선택을 앞둔 수많은 순간들마다 우리는 그것을 해야만 하는 탄탄한 근거를 찾으려 든다. 사랑이 시작되려는 순간 내가 이 사람을 왜 사랑하는지 규명하려 하고, 사랑을 끝내려는 순간에도 내가 그런 마음을 먹게 된 계기를 추적한다. 직업을 고를 때에도 꼭 그 일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내려 하고, 직장을 때려 치울 때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찾다 찾다 못찾으면 지어내어서라도 최대한 거창하고 필연적인 이유들을 마련한다. 그마저도 실패하면 자신의 경솔함을 책망하거나 선택을 유보해 버리고 만다. 때로는 타인의 선택에 대해서도 그깟 이유로 그런 선택을 했냐며 타박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그 옛날 어느 날, 엄마가 예쁘고 아빠가 근사해서 태어났고, 루돌프는 그냥 코가 밝아서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사슴이 되었고, 백호는 소연이가 건넨 한 마디 때문에 바스켓 맨이 되었다는 것. 우리에게 일어난 중요한 일들 대부분이 아주 사소한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