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아마도 립서비스였겠지만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충분히 알겠어. 나한테 고백해준 것도 기쁜데, 나는 너랑 친구로 지내고 싶어. 미안해. 절대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그냥 나랑은 좀 아닌 것 같아. 넌 충분히 괜찮은 애니까 더 좋은 사람 만나.”
스무살 무렵, 숱하게 차이고 다녔던 그 때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 연애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했지. 이번에도 단지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이야. 그래도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해줬다는 게 내겐 커다란 위안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고, 다른 몇 명의 사람에게 비슷한 멘트를 듣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나의 고백은 다소 부담스러웠고,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말은 그 이상이 되고싶지는 않다는 이야기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장황한 거절의 말은 단지 미안함을 덜기 위한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 거짓말이 참 고맙다. 애써준 덕분에 나는 상처입지 않았거든.
북산과 능남의 연습경기, 시합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백호는 당연히 선발 라인업에 들지 못했다. 왜 자신을 출전시키지 않느냐고 묻는 백호에게 안감독은 말했다. “자네는 비밀무기니까, 스타팅 멤버가 아니라네.” 시합에 한 번도 뛰어본 적 없는 풋내기를 정말로 비장의 카드라 여길 감독은 없다. 그건 단지 백호를 진정시키기 위한 안감독의 립서비스였을 뿐이다. 경기 종료를 9분 앞두고 부상당한 채치수를 대신해 백호를 투입한 것도 승부수라기 보다는,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경기에서 그저 시험삼아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립서비스로 인해 백호는 정말로 비밀무기가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시합을 뛰게 된 백호는 기죽지 않고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경기력을 선보인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비밀무기’라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말 덕분에 백호는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고 정말로 비밀무기로서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마저 느꼈다. 그 덕분에 백호는 도내 최장신 센터인 변덕규와 불세출의 천재 윤대협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뜻밖의 활약을 펼칠 수 있었고, 패색이 짙었던 북산은 능남과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었다. 왜 자신이 선발이 아니냐고 따지는 백호에게 안 감독이 “농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어딜 감히 선발을 탐내나? 자네는 후보선수이니 자리에 앉게.” 라고 말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나 역시 “너는 괜찮은 애야.” 라는 립서비스를 믿었다. 그 덕분에 또다시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그에게 다가가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쉽게 자기혐오에 빠지는 안좋은 버릇이 있던 내게 그 말은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만큼은 내가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는 희망이 되기도 했고, 정말 그렇게 되어야겠다는 책임감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좋은 사람을 만나 뜨겁게 사랑도 해 보고, 언젠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라는 소리도 들어볼 수 있었다. 나를 거절했던 이에게는 단지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었던 배려 섞인 거절의 말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어려웠을 수도 있었던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