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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백수 Jun 29. 2019

다섯 번째 슛: 두고 온다

용 쓴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지금은 그런 욕심이 거의 없어졌지만, 몇 해 전 나의 꿈은 유명한 연예인이 되는 것이었다. 명색이 가수인데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 같은 데 나와서 한 번 ‘빵’ 하고 뜨고 싶은 욕심이 온 마음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뜰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일단 뜨려면 무조건 텔레비전 프로그램부터 출연하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경력도, 소속사도, 매니저도 없는 햇병아리 인디뮤지션을 어떻게 알고 방송에 출연시켜주겠나. 고민 끝에 나는 일반인 출연자에게도 열려있는 프로그램 몇 개에 출연신청을 하게 됐고, 몇 군데 출연하는 데 성공했다. 


 일단 출연만 하면 주목받을 자신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간 이래로 나는 어느 자리에서건 대화를 주도하는 '인싸'였다. 어떤 친구 무리에 끼더라도 나름의 유머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할 줄 안다고 자부하곤 했다. 게다가 나는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일이 내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밤을 새워 개인기를 준비하고,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련했으니 이제 스튜디오를 뒤집어 놓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티비 속 내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KBS ‘안녕하세요’ 에서도, MBC ‘위대한 탄생’에서도 내가 의도했던 ‘인디 씬이라는 흙 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예능 캐릭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어떻게든 한 마디 더 해보고 싶어 어색한 농담을 던지는 가여운 청년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조리있게 말하고 싶은 욕심에 오히려 말은 장황해져 갈 곳을 잃었고, 가뜩이나 잘생기지 않은 얼굴은 쓸데없이 비장해서 웃음조차 제대로 짓지 못한 채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작진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출연한 회차들은 모두 그다지 재미가 없었고, 당연히 나의 티비 출연은 쥐도 새도 모르는 나만의 이벤트로 남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밝혀지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몇 해가 지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취업을 부탁해’라는 예능형 취업 토크쇼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메인 MC 유재환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재환이는 당대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단 몇 분 출연해서 시청자들의 배꼽을 쏙 빼 놓았고, 그것을 계기로 예능계의 블루칩이 되었다. 그와 매주 만나 방송 촬영을 하며 가장 인상깊었던 건, 카메라 앞과 뒤에서의 그의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거였다. 무한도전에서 가수 아이유씨를 만나 그토록 신나게 호들갑을 떨며 속사포처럼 그녀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던 모습. 재환이는 촬영장에서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도 언제나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친구고, 화면에서 보던 것처럼 말이 빠르고, 남에게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의 행동은 어떻게든 유명해져 보겠다는 욕망이라거나 무리한 개그 욕심 같은 것이 아닌, 평소 모습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애처롭고 부자연스러운 모습보다 애쓰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에 이끌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그 친구와 나의 차이점이었던 것이다. 


 내가 잊고 있었던 건 이 세상에 무리하게 힘을 주어 잘 되는 일은 없다는 너무나도 쉽고 흔한 이치였다. 어릴 적 수영을 배울 때 “힘 빼야 돼요! 힘 주면 안 떠요!”라던 강사선생님의 외침에도, 복싱을 배울 때  “어깨에 힘 빼고 그냥 툭툭 던진다는 느낌으로 때려.”라던 코치님의 말씀에도 있던 이치. 앨범을 녹음할 때마다 보컬 디렉터가 내게 말했고, 노래 잘 하는 방법을 친구들이 물을 때마다 나도 말했던 “너무 잘 부르려고 애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힘 빼고 불러봐.”라는 말 안에도 있던 이치. 그리고 강백호의 풋내기 슛에도 담겨있던 이치.

슬램덩크 완전판 2권, 이노우에 다케히코, 대원

 농구에서는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레이업 슛을 도무지 성공시키지 못하고 있는 백호에게 소연이가 다가와 그의 오빠 치수에게 들은 비결을 전해준다. 


 “우선 무릎을 부드럽게 하고 몸 전체로 뛴 다음, 볼을 림에 두고 오는 그런 감각이랄까?”


 팔에 힘을 주어 공을 던져넣으려 애쓰던 백호는 그녀가 건넨 ‘두고온다’는 말을 되뇌며 뛰어올라 림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고, 언제나 림이나 백보드를 맞고 튕겨져 나오던 공은 그물 속으로 쏙 빨려들어갔다 그렇게 그는 첫 번째 풋내기슛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내게는 징크스가 하나 있다. 야심차게 시작한 일은 그다지 좋은 성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반면에 별로 기대하지 않은 것에서 뜻밖의 좋은 결과를 만나곤 하는 것이다. 영혼을 갈아넣어 만든 곡이나 책은 별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반면에 가벼운 마음으로 무심 코 쓴 노래와 책이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곤 한다. 사력을 다해 구애를 한 상대에게는 반드시 거절당하고, 단지 좋은 느낌이라는 이유로 가볍게 시작한 연애로부터 오래도록 기억 남을 만 한 멋진 순간들을 수없이 선물받았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징크스가 아니라, 단지 무슨 일이건 힘을 빼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간단한 이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이치를 알고 있다고 해도 힘을 뺀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골프에서는 힘을 빼는 데만 3년이 걸린다고 했으니 말이다. 특히 무언가 간절한 상황 앞에서,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 앞에서는 더더욱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군다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훈련과 학습이 필요하다. 어려운 방식의 훈련이나 학습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어깨근육이 긴장되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중얼중얼 되뇌이는 훈련 말이다. ‘두고 온다, 두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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