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가장 어려운 일
K씨는 얼마 전 술자리에서 알게 된 사람. 초면이었지만 이야기가 잘 통해서 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도 한때는 작가를 꿈꿨더랬다.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이었을까. 내 생활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다.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생활은 어떻게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내가 유명한 음악가이고 문학가였다면 아마 그런 질문은 듣지 않았을 거다. K씨의 책장에 내 책이라도 한 권 꽂혀 있거나, 그의 플레이리스트에 내 노래라도 한 곡 있었다면 어련히 그것으로 벌어 먹고 살겠거니 할테니까. 그러나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가수고 작가라고 하니 그런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내 생활을 묻는 말투와 표정이 조심스러워서 전혀 무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음악이랑 글로 먹고 살아요. 인세나 저작권료도 있지만 공연도 하고 고료도 받고. 대충 그렇게 살고 있어요. 강연 같은 것도 다니고요.”
“강연이요? 어떤?”
“기업이나 학교 같은 데서 하는 초청 강연 같은 거 있잖아요. 종종 그런 걸 다니기도 해요.”
강연이래도 사실 대단할 건 없다. 그냥 내 노래에 소소한 이야기 몇 마디를 보태 그 사는 이야기나 주저리 주저리 해 대는 것일 뿐이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대단한 성공스토리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이야기를 지루하지나 않게 전할 뿐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 업계에도 틈새시장이라는 게 존재했는지 간혹 나를 찾는 연락이 오기도 하고, 그것이 이제 내겐 아주 중요한 생활의 토대가 되었다.
강연을 다니다 보면 성공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나만 단독으로 섭외하는 경우도 있지만 티비에도 많이 나오는 유명한 분들의 강연 앞에 마치 바람잡이처럼 내 순서를 끼워 넣기도 한다. 보통 그 분들은 내 순서가 진행되는 동안 대기실에 도착하고 내가 강단에서 내려올 때 나와 눈인사를 나누며 강단에 오른다. 나는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짐만 대충 챙겨 대기실에 두고 객석에 앉아 그 분들의 강연을 구경하고 가는 날이 많다.
강연을 이루는 이야기들의 뼈대는 대부분 비슷하다.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들에게 어느 날 어떤 기회가 찾아온다. 경쟁자들 사이에서 그들은 남들과 다른 ‘어떤 것’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그 기회를 쟁취해낸다. 이후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뜻밖의 시련이 닥친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것’을 통해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해내고 지금에 왔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만의 ‘어떤 것’을 찾길 바란다-는 이야기. 강연은 주로 그 ‘어떤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끝내 원하는 것을 쟁취해낸 그들의 이야기는 농구에서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전쟁터 같은 골밑에서 경쟁자들과 함께 뛰어 올라 노골 된 볼을 잡아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높게 뛰어오르는 것도 중요하고 뛰어오르는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버텨내는 것이 먼저다. 골 밑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나를 뚫고 들어오려는 상대의 끈질긴 시도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스크린 아웃.
“몸으로 버티는 거다! 힘으로 상대를 밀어내! 이것이 스크린 아웃이야!!”
백호에게 스크린 아웃을 가르치던 채치수의 외침이다. 리바운드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뛰어오르는 것보다 자신의 위치에서 버텨내는 것이 먼저라는 이야기이다.
자신을 비범하게 만든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명사들에게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에게 시련이 찾아오기 전에는, 그보다 훨씬 먼저 성공의 발판이 되는 어떤 기회가 찾아오기도 전에는 그들에게도 버텨내야만 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면 현실적 어려움이나 타인들의 비아냥 같은 것들이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내 마음을 나동그라지게 만들기 위해 달려들곤 했을 거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아마 K씨도 내게 그런 것들이 궁금했겠지. 무언가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작가를 꿈꾸던 그 역시 버텨내는 것의 어려움을 겪었을 테니까. 내가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설명하면서도 마음 한켠은 무거웠다. 자신 있는 척 해도 사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버겁거든.
그렇게 스크린아웃을 터득한 이후로 백호는 자신보다 무려 14센티나 커다란 도내 최장신 센터 변덕규를 상대로도 리바운드를 잡아낼 수 있게 된다. 어찌됐건 버텨내기만 한다면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잡아내는 것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런데 그 버텨낸다는 일이 언제나 참 어렵다. 그게 항상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