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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백수 Mar 24. 2020

소멸을 꿈꾸는 밤

시와 세계 60호

소멸을 꿈꾸는 밤

강민구


그녀는 언제나 죽음을 꿈꾸던 저를 살아있고 싶게 만든 세상 유일한 여자였다구요 -라는 헛소리를 하며 눈물 콧물을 쏟는 그를 보며 나는 그의 입에 들어가고 있는 두부김치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두부와 김치와 만오천원에 담긴 가능성들과 적지 않은 에너지를 하나마나한 소리에 탕진하다니 그래 영화랑 드라마가 애들을 망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언제나 죽음을 꿈꾸던 저를 살아있고 싶게 만든 세상 유일한 여자였다구요 –가 어떻게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인가 테레비에서나 나오는 말이지 이따가 술값을 계산하면 영수증을 챙겨서 방송국이나 방송통신위원회 같은 데에다가 비용처리를 요구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그 있으나 마나 한 시간을 견뎠다


자살은 참 이기적인거야 남은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받을 상처나 고통 같은 건 하나도 생각을 안 한거잖아 –어느 연예인의 사망 뉴스를 보며 아버지는 일부러 나 들으라고 그런 말을 하신걸까 보도블럭처럼 늘어선 수많은 선택의 순간마다 자살이 하나의 옵션으로 끼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건네는 일종의 예방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를 닦아도 찝찝한 그 밤 나는 아주 원대하고 사려깊은 방식의 자살을 꿈꾸게 되었다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할 가능성에 관한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남몰래 플래닛 엑스니 플로렌스니 하는 멋진 이름을 가진 천체들이 무사히 지구 표면에 부딪치기를 기도했다 한치의 애매함도 남기지 않도록 세상 모든 빛과 생명의 플러그를 뽑아주소서 두꺼비집을 내려주소서 모든 기도에 힘이 깃든다면 나의 자살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실행되고 있으리라 믿사옵나이다


사라져버린 돈 몇 푼과 몇 시간을 아쉬워하며 막차가 끊긴 도로에서 하늘을 본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천체를 찾는다 죽음을 꿈꾸던 이들이 한 놈은 속이 쓰리다며 징징댔고 한 놈은 발이 아프다고 택시를 탔다 이 놈의 충돌설은 누가 자꾸 기사화 하는 걸까 네이버 과학/IT 뉴스의 한 켠에 또 기어올라온 복음이여 아무리 기도해도 지구는 멀쩡히 자전도 하고 공전도 하고 저 새끼는 내일 해장국을 처먹든 컨디션을 처먹든 제 몸 챙기느라 바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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