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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Dev Jan 30. 2023

개발자가 안경테 구매한 이야기

제품, 스토리 그리고 브랜드

우리들은 스토리에 매력을 느낀다


유튜브에서 파타고니아, 슈프림보다 핫한 브랜드 'YETI' 이야기(출처: 브랜드보이) 영상을 봤다. 소비자들은 예티 아이스박스가 얼마나 튼튼한지 얼마나 얼음이 녹지 않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예티와 관련된 스토리를 통해 로망을 갖는다(YETI Presents).


파타고니아, 슈프림보다 핫한 브랜드 'YETI' 이야기 중에서 출처: 브랜드보이

명품이 흔한 기성품이 된 2023년에 기능적 품질이나 저렴한 가격은 좋은 제품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일 뿐 매력이 되기엔 부족하다. 대신 소비자들은 제품이 가진 스토리에 더 관심을 갖고 매력을 느낀다.


처음 본 하우스브랜드 안경을 샀다


연말을 맞이해 판교 현대백화점에 방문했다. 지하 1층 이벤트 홀을 둘러보던 중 하우스브랜드 안경테 매대에 들렀다. 구매 계획이 없어도 안경테가 진열된 곳이 보이면 항상 들르곤 한다. 안경은 내게 눈이면서 얼굴이었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일본식 디자인의 안경테들에 눈길이 갔다. 일본 브랜드의 안경테는 상대적으로 작은 렌즈에 폭이 좁은 프레임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에서 김남희 배우가 연기했던 모리타카시가 착용하고 나오는 안경이 그 예이다. (최근 재벌집막내아들 진성준으로 더욱 주목받은 배우와 동일인이다)


미스터선샤인 중 안경을 착용한 모리타카시 출처: tvN

이런 류의 디자인은 작고 얼굴을 가진 일본 사람들에게 잘 어울린다. 체형 대비 상대적으로 큰 얼굴을 가진 한국 소비자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디자인이다. 안경테를 제외한 부분에 여백이 많이 생겨 얼굴이 크게 부각되고 자칫하면 눈코입이 몰린 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소에 사고 싶었던 일본 브랜드의 안경 출처: 사가와후지이

그런데 예상외로 시착한 안경이 얼굴에 잘 어우러진 느낌이었다. 안경 렌즈 사이에 코 받침대 공간에 여유가 느껴졌고 안경테가 여유 있게 얼굴에 분배된 느낌이었다. 덕분에 얼굴 여백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딱 내가 찾고 있는 안경이었다. 작고 동글동글한 디자인의 클래식한 감성도 그대로였다.


두리번두리번 한참을 착용해보고 있으니 제작자라고 소개한 남성이 다가왔다. 그리곤 묻기도 전에 한국인 얼굴형에 맞게 어떻게 개량했는지 설명했다. 제작 의도는 어땠으며 어떻게 접근했는지 등등. 안경에 대해서 빠삭했다. 내내 신나서 떠드는 그의 이야기와 안경에 진심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류의 안경을 좋아할 사람들이라면 내용도 충분히 공감이 가기도 했다. 결국 제품을 구매했다. 제품도 만족스러웠지만 제작자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닿았다. 다소 감성적인 유형이라 제품을 구매할 때 무엇을 만들었지 보다 어떤 사람(또는 브랜드)이 만들었는지가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안경 이야기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녹아 있었다. 그가 곧 제품이고 제품이 곧 그였다.


당신의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동네 서점에 들렀다. 우주소년이라는 작은 카페를 겸하고 있는 책방이다. 방문한 날 마침 책방 행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책방이 만들어지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직접 이야기로 듣는 기회를 가졌다(책으로 지키고 싶다, 숫자로 바꿀 수 없는 마음을). 아내가 이미 책방에 관심이 많아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직접 듣게 되니 좋았다. 커피를 마시며 한동안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낸 후에 아내는 책을 한 권 짚어서 나왔다. 집으로 걸어오면서 오늘 구매한 제품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아내는 우주소년 책방에서 책을 한 권 꼭 사고 싶었다고 했다. 책을 좋아하고 책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른 책은 어떤 책일지 궁금했다고.


아마도 책방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 고른 책이니까 의미 있는 책이지 않을까?


문득 생각해 보니 안경을 구매한 이유와 다르지 않았다. 기본기에 충실한 손색없는 안경이었다. 얼굴에도 꼭 맞았고 착용감도 좋았고 견고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끌어낸 것은 안경에 진심이었던 제작자와 애정이 넘치던 제품 이야기였다.


가격은 19만 8천 원


마냥 비싸다고 할 순 없다. 10~20만 원대 신발을 대수롭지 않게 구매하기도 하니까. 다만 안경을 시력 교정용 정도로 여기는 구매자가 대다수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마냥 싸다고 할 수도 없다. 솔직히 '굳이?'라는 생각이 드는 가격이다. 안경원에 가면 준수한 품질의 안경테를 1~2만 원에도 구매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것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부르는 게 가격인 다수의 하우스브랜드 중 몇 개나 그 기준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하우스브랜드 안경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유명한 브랜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돈을 지불했던 이유는 제품이 거친 과정 때문이었다. 19만 8천 원이라는 가격에는 그 과정이 담겼고 제작자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내게 전달됐다. 그 스토리에는 제작자의 제품에 대한 고민, 제작 의도, 태도가 담겨 있었다. 거기에 안경에 진심이었던 그날의 모습까지. 그날 그는 그의 제품 브랜드에 돌 하나를 쌓았다. 아마도 어디선가 다른 고객에게 또 다른 스토리를 통해 돌 하나를 더 쌓았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리라는 것은 차근차근 만들어지다
우연한 기회에 브랜드로 완성되는 게 아닐까


안경 케이스에도 디테일을 아끼지 않은 것을 보면 스토리에 대한 의심의 여지는 없다




개발자, 기획자도 제품, 서비스를 만들어 사용자들에게 전달한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는 어떤 스토리를 통해 사용자들과 교감하고 있을까? 과연 우리의 서비스는 사용자들에게 단순히 기능을 제공하는 수준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가치를 전달하고 있을까? IT 서비스도 럭셔리 브랜드처럼 고유한 브랜드와 스토리를 갖고 있다. 카카오 하면 춘식이가 떠오르고 빠른 배송을 얘기하면 쿠팡을 얘기하는 것도 다 브랜드가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본인이 개발하는 서비스부터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게 없다... 돌아보니 내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의 브랜드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못했다. 반성할 일이다.


당신도 좋던 나쁘던 브랜드를 갖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의 평판 또는 인상이라고 한다. 역량, 성격, 인성, 태도, 외모, 복장, 취미, 성향, 자잘하게는 말투 하나하나가 당신의 브랜드가 되는 재료가 된다. 미니멀리즘 PO, 맥시멀리즘 PM, 엄마 같은 기획자, 술 좋아하는 개발자, 의외로 옷을 좋아하는 개발자, 일본 오타쿠 OOO, 비건 등등 무언가를 보면 떠오르는 그들만이 가진 케릭터가 있다. 이런 케릭터들은 당신과 관련된 일화들과 엮여 소문을 타고 돈다. 그렇게 당신의 브랜드가 만들어진다.


제품처럼 우리도 사회, 회사, 조직, 동료에게 우리 자신을 매일매일 팔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같이 일하고 싶은 동료로 평가받고 찾아주는 구매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사람이 돼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브랜드에 대한 평가는 소비자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


당신은 어떤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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