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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변호사 Apr 28. 2017

이혼에 대한 소고

1.

친구가 이혼을 했다. 그제 저녁에는 영국인 진지를 점령한 무어인마냥 술을 마셨다. 주변 아가씨들이 왜인지 이혼을 한두 번씩 했기에 이런 경우 어떻게 해주면 좋은지 잘 안다 - 익숙해지진 않는다. 되도록 음악이든 사람이 많든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시끄러운 술집에서, 안주를 다 먹지 못할 만큼 푸짐하게 깔아두고, 옆에서 큰 소리로 육두문자를 내뱉는 걸 들으며 함께 술을 마셔주면 된다. 그리고, 닥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된다. 


이어지는 사람의 삼분지 일이 헤어진다. 여상한 일이다. 불행한 일도 아니다. 다만 슬픈 건 슬픈 거다.


2.

예전에 로펌을 그만두고 사내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한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급여에 대해 불만족도 없었다. 서면 작성이나 동료/상사에 의한 스트레스, 복지 수준의 문제 따위가 아니라, 오롯이 나의 문제였다. 웃기는 얘기지만 소위 '감정 이입' 때문이었다. 서면을 쓰다 보면 의뢰인이 무고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억울한 점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든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새 감정적으로 의뢰인에게 몰입돼 있다. 덕분에 서면은 잘 썼다. 기가 막히게 쓴다, 10년차보다 잘 쓴다 별 칭찬을 다 들었다. 그놈의 감성. 서면을 의뢰인 마음에 꼭 들게 쓰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문제는 패소라도 하면 너무 타격이 컸다는 점이다. 판사를 설득하는 능력과 송무의 적성은 다른 얘기였다. 내가 써놓고도 내 일 같았다. 주변에서는 나를 다잡아주려 많이 노력했다. 고마운 일이다. 생각보다 많은 신입 변호사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의뢰인을 대리해서 싸워주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의뢰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하면 심신이 버티질 못하니 정신 차려라… 다들 충고를 했다. 맞는 말인데 헬스장에 매일 새벽 나가는 것처럼 실천이 어려웠다. 무심하기 힘들었다.


나를 찾아온 사람, 바로 곁의 사람을 돕고 싶어서 변호사가 된 것이었다. 무심해져야 진짜 변호사가 되는 것이라면 굳이 변호사가 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싶었다. 사춘기 중딩마냥 충동적으로 이력서를 썼다. 그렇게 회사에 왔다(그리고 노예처럼 일하고 있다). 일을 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을 안 건 뒤늦게, 몇 년이 지난 후였다.


생각해보면 형사 위주 펌이었기에 그렇게 많이 기회는 없었지만 가사사건에 대한 서면도 쓸 기회가 있었다. 제일 괴로웠던 게 가사사건 서면이었던 것 같다 - 깊이 들어가는. 상대의 귀책사유를 하나 둘 꺼내다 보면 어느 새 상대방은 성격파탄자나 사이코패스로 변해 있다. 그땐 다들 사랑해서 결혼했을 텐데 이게 무슨 변고인가. 서면을 쓰다 멍하게 우울해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이혼을 경험한 주변 사람들도 있었다. 만나볼까도 싶었지만 그거야말로 민폐다 싶어 참았다. 그런 소리 꺼내지 않길 잘하였다.

초짜 변호사가 허들을 넘지 못한 거라고 말하면 그게 맞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그냥, 송무가 내게 안 맞았을 수도 있다.


3.

너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30대에는 책을 쓰자고 생각했는데 벌써 30살을 훌쩍 넘어버렸다. 브런치에서 책 만드는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니, 한번 이용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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