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세계와 영화 <마스터>
“난 작가이자 의사이고 핵물리학자이자 이론 철학자이네. 그러나 그 이전에 한 인간이지.”
극 중 랭카스터 토드의 이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영화 <마스터>는 종교영화이자,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고 방황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완벽해 보이지만 결점 많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것은 결핍에 관한 영화이다.
현대 영화계에서 가장 독자적인 필모그래피를 이어가고 있는 젊은 감독을 꼽으라면 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을 꼽겠다. 초기작들에서 그는 스콜세지와 로버트 알트만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숨기지 않는다. 스콜세지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마지막 장면에선 <성난 황소>를 오마주했던 <부기나이트>,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의 영화적 구성을 이어받아서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 다루는 <매그놀리아>는 물론이고,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마지막에 故 로버트 알트만에게 영화를 헌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이런 감독들의 아류가 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화관을 발전시켰다.
PTA는 또한 미국의 시대상에 관심이 많은 가장 미국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7~80년대 포르노 산업에 대한 영화 <부기나이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해 다루는 <데어 윌 비 블러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유증을 겪는 인간과 신흥종교에 대한 영화 <마스터>, 70년대 LA의 히피문화에 대해 다루는 <인히어런트 바이스>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다양한 시대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건 PTA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미국의 부흥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불안정한 시기의 불안한 인간상에 대해 다룬다. <부기나이트>는 포르노 사업이 비디오 시대로 넘어가면서 몰락하는 과정을 한 포르노스타를 통해 그리고 있고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선 석유를 둘러싼 인간의 탐욕과 그 안에서 생겨나는 종교와 자본의 대립과 결합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마스터>에서는 2차 대전 생겨난 신흥종교의 모습을 통해 불안한 시대상을 그려내는가 하면 <인히어런트 바이스> 또한 히피의 전성기가 아닌, 찰스 맨슨 살인사건 이후 히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지던 분위기의 사회가 배경이다.
PTA의 영화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주제를 꼽자면 그것은 결핍이다. PTA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안하고 나약하며 결핍되어 있는 존재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대상을 찾아 헤맨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배리’는 7명의 누나들 밑에서 자란 소심하고 용기 없는 사람이지만 ‘레나’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 때문에 강해진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은 끝없이 돈을 추구하는 사업가이고 한없이 외로운 존재다. 알코올 중독인 그는 아무도 믿지 못하고 오직 가족, 혈육(Blood)만 믿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죽은 직원의 아이를 입양해서 자신의 핏줄인 것처럼 함께 데리고 다니지만, 그 아들이 사고로 청각장애인이 되고 자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가차 없이 아들을 버린다. 결국 그 동생이 사기꾼인 것을 알게 되자 그를 살해하고 다시 아들을 데려오는가 하면 그 아들이 자라서 자기와 같은 석유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었다고 하며 그를 사생아라고 모욕하며 버린다.
PTA의 영화들에서 기본적으로 가족은 대개 자신을 옥죄는 굴레고 부정적인 존재다. 특히 부모의 존재가 그렇다. <부기나이트>에서 주인공 ‘에디’의 어머니는 억압적이고, 아버지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매그놀리아>는 아예 아버지들에 의해 상처 받은 자식들의 이야기다. 그리하여 인물들은 대체 부모상, 특히 대체 아버지상에 의지한다. <리노의 도박사>의 ‘존’은 ‘시드니’와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이고 <부기나이트>에서 ‘에디’는 가족을 떠나 포르노 영화감독 ‘잭 호너’와 생활하고 갈등으로 잠시 그를 떠나지만 결국 몰락한 그가 향하는 곳은 ‘잭’의 품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이전까지 PTA의 영화들은 자식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사람이나 대체 아버지상을 찾아 헤매고, 불완전하지만 함께 서로를 채워가는 식이었다. 그것은 그리고 PTA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자식이 아닌 아버지가 되었을 때, 그는 <데어 윌비 블러드>를 통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PTA의 최고 걸작은 <매그놀리아>와 <데어 윌 비 블러드>이다. <매그놀리아> 개봉 당시 PTA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여러 인물들에 대해 다루면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영화를 그는 놀라운 연출력으로 리듬을 유지하고 통일성을 이끌어낸다. 마지막에 쏟아지는 개구리 비 시퀀스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또한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고전의 느낌을 영화 내내 물씬 풍겨댄다. 그전의 화려한 연출을 절제한 엄숙한 이 시대극을 통해서, 그는 고작 만 36살에 영화적 문법에 통달했음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마스터>가 PTA 필모그래피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전 영화들에서 결핍된 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다룬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결핍된 쌍방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전 영화들과 달리 <마스터>는 주제 자체가 ‘결핍’이며 자신이 의지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인물에 관한 영화이다.
주인공 ‘프레디 퀠’은 그 전의 PTA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을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있는 그는 풍만한 여성에 대한 욕망을 통해 모성의 결핍을 드러낸다. 또한 아버지처럼 알코올 중독에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고 전후 후유증에 시달리며 방황을 한다. ‘프레디’는 종전 후 사진사를 하게 되는데 사진이란 건 결국 한 대상을 프레임 안에, 필름 안에 가두는 행위이다. 그는 그 직업을 통해 자신의 역마살을 억누르고 자신을 사회의 틀에 적응시키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만나려는 여자와의 데이트에서 그는 술에 절어 잠만 자기도 하고, 직접 술을 제조해서 마시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그는 한 손님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붙고는 다시 떠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프레디’가 시비를 거는 남성의 모습이 후에 등장하는 ‘랭카스터’와 매우 닮아있다는 것이다. 또 ‘프레디’가 만나던 여자 또한 ‘랭카스터’의 딸과 닮아있다. 이것은 영화의 내용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후에 자신의 술을 먹고 쓰러진 노인으로 인해 오해를 받고 도망가는 장면에서 그는 일직선으로 평행하게 끝없이 갈린 밭을 수직으로 가로질러 달려간다. 하지만 그를 쫓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잠시 화면에 나오다가 이내 사라진다. 이 한 장면으로 그의 캐릭터를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사회의 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람이고 그가 도망치려는 대상은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그 사회 전체이다.
도망을 치다가 올라탄 배에서 그는 ‘랭카스터 토드’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프레디’가 그동안 찾아 헤매던 ‘마스터’ 같다. 온화하고 명석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그는 모두가 비판하는 ‘프레디’의 술을 훌륭하다고 칭찬한다. 전후 상담사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숨기던 ‘프레디’는 프로세스를 거치며 자기의 숨겨진 내면을 고백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이 배라는 공간은 다양하게 보여질 수 있다. 뱃사람이자 해군이었던 ‘프레디’는 배 안에서는 자유롭다. 한 곳에 정착해 있지 않고 자유롭게 바다 위를 떠도는 배는 그의 성질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랭카스터’에겐 그만의 세계이자 왕국이다. 그의 논리를 공격하는 사람들 없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서, 그는 우두머리로 군림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들이 겹쳐짐으로써 ‘프레디’와 ‘랭카스터’는 가까워지게 된다. ‘프레디’는 그 전에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적 있다. 영화 초반, ‘프레디’가 마신 술을 먹고 쓰러진 노인에게 술을 주기 전, ‘프레디’는 그 노인에게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한다.
영화의 초반 부분 구성은 방황하는 ‘프레디’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가 완전해 보이는 마스터를 만나서 변화해갈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PTA는 <굿 윌 헌팅> 식의 내용을 거부한다. ‘랭카스터’의 세계인 배를 벗어나면서부터 그가 가진 불완전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 보여지는 모습과 달리 ‘랭카스터’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다. 자신의 비논리가 공격받자 논리적인 말 대신 화를 내며 인신공격을 일삼고, 그의 아들도 그의 말을 엉터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아내에게 통제받는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랭카스터’가 ‘프레디’의 술에 취해서 금발의 여성에서 놀아나지 않겠다는 노래를 부르며 아내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자 금발의 아내는 화장실에서 수음을 해주며 ‘프레디’의 술을 마시지 마라고 경고한다. ‘랭카스터’가 그의 아내에게 원초적인 면에서부터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프레디’의 술에 대한 호기심에서 둘의 관계는 영화가 흘러갈수록 서로가 의지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프레디’의 모습은 일종의 길들여지지 않은 사냥개 같다. ‘프레디’는 ‘랭카스터’를(그의 논리를) 공격한 사람을 찾아가 공격을 가하고 그것을 ‘랭카스터’에게 말하며 칭찬을 갈구한다. 또한 랭카스터를 체포하려는 경찰들에게 ‘프레디’가 덤벼들고, ‘랭카스터’가 그를 해치지 말라며 애원하는 모습은 주인이 체포될 때의 개의 모습과 흡사하다. ‘랭카스터’의 품을 잠시 떠났다가 돌아온 ‘프레디’가 ‘랭카스터’를 안고 함께 잔디밭을 구르는 건 주인이 돌아온 개를 반기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고, 사랑하는 연인 간의 과한 애정 표현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행하는 치료과정은 길들여지지 않은 ‘프레디’를 길들여서 머물게 하는 과정이다. 야설을 들려주거나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참게 해서 그의 본능적 행동을 통제시킨다. 특히 그가 실내에서 끝없이 벽과 벽 사이를 왕복하는 걸 시키는 것은 그를 밖이 아닌 안에 정착하도록 하는 의도이다. 실제로 그 과정은 ‘프레디’가 안에서도 바깥의 햇살과 나무를 느낄 수 있다고 할 때, 즉 더 이상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때 끝이 난다.
둘의 관계는 때로는 연인 관계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프레디’가 ‘랭카스터’를 떠난 후 꿈에서 그에게 전화가 왔을 때, 그는 ‘프레디’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냐고 물어본다. 사막에서 ‘프레디’가 떠난 뒤 쓸쓸히 걸어가는 ‘랭카스터’와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의 가사를 보자. “다른 어떤 사랑도 내 심장을 데울 수 없어요. 나는 이제야 네 품의 편안함을 알았어요.”
<마스터>의 ‘프레디’는 ‘랭카스터’를 위해 다시 사진을 찍는다. 자신을 다시 프레임 속에 가두고 적응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계속 떠나고픈 욕구가 다시 생기는 ‘프레디’는 그럴 때마다 다시 점을 잡아서 왕복하며 욕구를 억누르려고 한다. 사막에서의 오토바이 게임은 ‘랭카스터’가 시도하는 통제의 연장선이다. 오토바이로 한 점을 찍고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오는 걸 통해서 집 안에서 왕복하는 그 과정 확대한 것이다. 하지만 ‘프레디’를 가로막을 벽이 없는 사막에서, 그는 그대로 떠나버린다. '도리스'를 떠났듯이,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듯이, 이내 그를 떠나고 만 것이다.
"I can take pictures."
영화 <마스터>의 마지막, '랭카스터'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프레디'는 뭘 할 수 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로맨틱하다고 느껴지는 대사다. 속박되고 싶지 않지만서도 한 편으론 속박되고 싶은 그런 심정을 영화에선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표현해낸다.
마지막 만남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는 절절한 대사들을 보자. 마치 이별을 앞둔 연인들의 모습 같다.
‘랭카스터’는 ‘프레디’에게 지금 떠나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협박하며 머무르라고 말하지만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프레디’가 꿈에서 ‘랭카스터’가 그에게 그들이 과거에 만났던 곳을 찾아냈다고 말했다고 하자, ‘랭카스터’는 바로 대답한다. 이것은 그들이 꿈을 공유한다, 정신적으로 이어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랭카스터’는 ‘프레디’를 잡을 수 없음을 알기에 ‘프레디’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노래를 부른다. “I wanna get you on a slow boat to China, all by myself.” 배 위는 '프레디'와 '랭카스터' 모두에게 자유와 도피의 공간이다. 하지만 결국 ‘프레디’는 ‘도리스’를 떠나 중국 상하이로 간 것처럼, ‘랭카스터’를 떠나간다.
결국 이 둘의 관계는 한쪽이 한쪽에게 의지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 관계인 셈이다. ‘랭카스터’에게도 ‘프레디’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의 치료술을 증명할 대상이라는 이유뿐만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의 술이 필요했지만 갈수록 프레디 자체가 필요해진다.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목적 없이 맹목적으로 그를 따라주는 ‘프레디’에게 점점 더 기대게 되었다.
이 영화가 결국 말하는 것은 ‘내 결핍을 채워줄 이는 아무도 없다.’라는 것이다. 또한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된 감독이 이제 아버지상의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어떤 관계로든 ‘결핍을 채워줄 사람이 있을까?’에 대한 기나긴 고민에 대한 PTA의 답은 ‘NO’이다. 그의 다음 작품인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불안정하지만 자립적인 히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라고 글을 쓰던 당시(2017년)에 생각했지만 그의 신작 <팬텀 스레드>를 보고 난 후 PTA는 여전히 결핍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PTA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근원적 결핍에 대해 평생 탐구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