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하사탕> 리뷰
우리나라는 격변의 근현대사를 겪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은 많지 않다. 작년에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이 그 갈증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긴 했지만, 대부분 소규모 독립영화이거나 상업영화여도 작품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현대사의 격동을 겪은 대만의 경우 허우 샤오시엔의 걸작 <비정성시>가 있고, 검열이 심한 중국의 경우에도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라는 걸작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현대사의 아픔을 다룬 걸작이 나왔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다. <박하사탕>은 한 남자의 불행한 인생을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한다.
1999년 봄, 영화의 오프닝, 한 남자가 기차 철로 밑 계곡 가에 누워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근처에는 야유회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누워 있는 한 남자는 갑자기 야유회 하는 사람들 틈으로 불쑥 들어온다. 그 남자의 이름은 ‘김영호’, 알고 보니 야유회의 사람들과는 20년 전 알던 사람이다. 예전에 알았던 그 사람들 앞에서 ‘영호’는 훼방을 놓는다(그가 그러면서 부르는 노래는 절묘하게도 “나 어떡해”다). 그러더니 ‘영호’는 철교 위에서 절규하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열차를 마주하고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이 남자는 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영호’의 절규를 들어주기라도 하는 듯 기차는 거꾸로 역행하며 영화도 과거로 떠난다. 순차적으로 사흘 전, 1994년, 1987년, 1984년, 1980년, 1979년으로 돌아가며 영화는 하나씩 의문들을 남기고 그것들을 풀어나간다 (영호가 전 부인을 찾아가서 뽀삐를 보러 왔다고 한 게 얼마나 어이가 없는 장면인지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이 영화의 가장 큰 질문, ‘영호는 왜 저렇게 되었을까?’에 대한 이유를 찾아간다.
(스포일러)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순수함이 시대에 의해 망가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역순으로 보여주며 마침내 영호의 순수했던 시절에 이르러 그 비극성을 더한다. 만약 정상적인 구성의 영화라면 그 느낌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군사정부, 경제 부흥기, 그리고 IMF 등 현대사의 변혁 속에 놓여진 한 인물을 다룬다. 그리고 결국 영호가 망가지게 된 그 뿌리가 5.18 당시 첫사랑 순임과 착각했던 여성을 오발 사고로 죽인 사건 때문임을 보여주며 실마리를 푼다.
주인공 ‘영호’는 일반적인 영화들 속 주인공들과 달리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아저씨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평범한 남자 ‘영호’의 생을 돌이켜 감으로써 단순히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평범한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모두가 시대의 아픔을 겪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서 ‘박하사탕’은 영호의 순수함이다. 군 복무 시절 첫사랑 순임이 편지에 하나씩 보내온 박하사탕을 영호는 몰래 보관하는데 광주로 출동하던 중, 다급하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하사탕이 떨어지고 군홧발에 짓밟힌다. 이것은 영호의 순수함이 망가질 것이란 암시다. 그리고 광주에서 생긴 돌이킬 수 없는 사고에 의해 그도 돌아갈 수 없게 된다.
1984년, 영호는 전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경찰이라는 일을 택한다. ‘영호’는 선배 형사들의 강요로 고문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손에 변이 묻는다. 그것을 씻어내려 하는 ‘영호’에게 선배 형사는 웃으며 말한다. “그 냄새 잘 안 빠져.” 그때 ‘영호’에게 다시 나타난 순임, ‘순임’은 변으로 더럽혀졌던 ‘영호’의 손을 보고 손이 참 착하다고 말한다. 결국 ‘영호’는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자신을 다시 찾아온 ‘순임’을 모질게 떠나보내고 만다.
1994년 이미 타락한 ‘영호’는 불륜 상대인 미스 리와 식당에 있던 중 과거 자신이 고문했던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도중 미스 리가 먹여주는 박하사탕을 먹으며 변해버린 자신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살하기 며칠 전 혼수상태인 '순임'을 만나 박하사탕을 건넨다. 병원에 오기 전에 급하게 산 박하사탕을 '순임'이 오래전에 줬었던 것이라고 속이면서. "보세요. 옛날 모양 그대로 있죠?" '영호'가 간직하던 박하사탕은 군홧발에, 그리고 시대에 짓이겨졌지만 '순임'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영호'는 사실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고, 아니 변하지 않고 싶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자신의 순수함의 상징이던 ‘순임’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영호'는 마지막 남은 희망의 한 조각마저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순임’이 남긴 카메라마저 단돈 4만원에 팔아버리고 필름도 빛의 노출시켜버리며 절규한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수미상관적 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대는 다르지만 처음과 마지막이 같은 장소에서의 가리봉동 모임이고 영호가 누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 시작과 끝에 나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1979년의 젊은 영호는 문득 처음 와 본 그 장소를 전에 왔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동안의 영화의 시간들(자신의 미래)이 마치 꿈을 꾼 것 같다고 말이다. 하지만 ‘순임’의 바람과 달리 그 꿈(미래)은 전혀 좋은 꿈이 아니다. 영화의 초반에서 ‘영호’가 절규하며 부르던 “나 어떡해”를 다 같이 부르던 영호는 문득 철도 밑으로 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달리는 기차의 소리는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의 영호의 눈물이 순수를 의미한다면 첫 장면의 영호의 눈물은 순수를 잃어버린 후의 절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큰 대비를 이룬다.
영화에서 영호는 80년에 광주에서 총을 맞은 후유증으로 가끔 다리를 전다. 그 후유증은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다. 자신이 가졌던 순수와 현재의 모습이 대립할 때 영호는 다리를 전다. 돌아온 순임을 모질게 대하며 기차역에서 떠나보낼 때, 순임의 고향 순천에서 첫사랑을 떠올린 다음 날 사람을 체포할 때, 죽어가는 순임을 만나고 돌아갈 때 그는 다리를 전다. 특히 순임을 기차역에서 떠나보내고 난 후, 술에 취한 그는 군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술자리에서 난리를 피운다. 그는 선배 경찰들에게 군대 제식 훈련을 강요하며 난동을 피운다. 변해버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영호’가 거울을 보는 장면을 자주 보여주는 것 또한 이와 비슷하다.
이 영화의 주요 키워드는 기차이다.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철도 근처이고 시간을 거슬러 갈 때 기차가 철도를 다니는 풍경을 거꾸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처럼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호를 위해 시간을 되돌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 눈물을 흘리는 영호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은 거스를 수 없는 시간과 시대에 대한 좌절의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다. 결국 영호는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을 막기 위해 질주하는 열차 앞에 선다. 불가능하지만 무심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보이는 시대의 흐름을 개인이 막아보려는 처절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