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태엽 Jun 10. 2018

시선의 문제에 대하여 - <디트로이트> 리뷰

영화 <디트로이트> 리뷰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관객과 인물들을 극단의 상황에 몰아넣고 옥죄여 가는 연출의 장인이다. <허트 로커>에서는 관객을 전장의 한가운데로 데려가 심장이 터질듯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냈고 <제로 다크 서티>에서는 10여 년의 빈 라덴 체포 과정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물의 군상과 공허를 담아냈다. 또한 캐스린 비글로우는 미국이 마주하고 있는 폭력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문제와 딜레마를 후벼파는 감독이다. <디트로이트>는 감독의 앞선 두 작품의 특징들이 섞여 있다.



 캐서린 비글로우가 이번에 다루기로 한 미국 사회의 문제는 바로 인종차별이다. <디트로이트>는 1967년 7월 미국의 대도시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다.

 7월 23일 경찰이 디트로이트 흑인 밀집 지역 한 무허가 주점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흑인이 대거 체포되고 그 장면을 주민들이 보게 돼서 문제가 시작된다. 분노한 흑인들로 인해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거리가 불타오르자 미시간주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린든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디트로이트에 4천100명의 공수부대 병력을 급파한다. 혼돈과 무차별성은 의원 연설 장면에서의 혼란과 흑인 아이가 공수부대를 보려고 블라인드를 조금 움직인 것을 저격수로 오인해 사격을 하는 장면 등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공수부대가 투입된 27일 밤 디트로이트의 알제 모텔에서 의문의 총성이 울린다. 흑인 ‘칼’이 공수부대를 향해 육상경기용 장난감 총을 발포한 것이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저격수가 총을 발포한 것으로 판단한 디트로이트 경찰과 공수부대는 즉각 알제 모텔을 포위하고 사격을 하고 투숙객들을 과격하게 제압한다. 이 과정에서 ‘필립 크라우스’는 도망가려는 ‘칼’을 사살한다. ‘크라우스’는 이미 도망가는 흑인의 등을 쏜 것이 문제된 적 있는 경찰이다. 그는 이번에도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칼’을 쏴 죽이고는 쓰러져 있는 그의 옆에 칼을 놓아 정당방위인 척 꾸민다.



 경찰관들과 군인들은 투숙객들을 일렬로 세우고 취조라는 이름의 폭력과 협박을 시작한다. 그들은 반드시 저격수의 정체와 총의 행방을 밝혀내야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취조받는 이들은 총의 존재 자체도 모르거나 그것이 장난감 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뿐이다. 진짜 총이 없지만 총을 찾아내야 하고, 심지어 장난감 총을 쏜 이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이미 사망한 상황에서 영화의 불쾌한 아이러니는 시작된다. 여기에 근처 가게에서 경비로 일하는 흑인 ‘디스뮤크스’가 가세한다.

 경찰들이 범죄자 취급하며 총구를 겨누는 흑인들은 베트남 참전 용사, 스타를 꿈꾸는 가수, 공장 노동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놀던 젊은이들로 그저 평범한 젊은이들일 뿐이다. 이뿐만 아니라 백인 여성들도 취조 대상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모두가 백인 남자인 경찰들은 투숙객들이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용의자로 몰아세우며 폭력적인 취조를 하고 흑인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백인 여성 두 명을 창녀로 몰아세운다. 이 과정에서 온갖 폭력과 협박, 성희롱이 이어지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벌어지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최대한 일을 잘 해결하려 하는 목격자 사이에서 긴장감이 유발된다.

 영화는 알제 모텔에서 일어나는 야만적인 일을 거의 1시간에 가깝도록 집요하게 담아낸다.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활용(혹은 남용)해서 관객들을 그날 밤의 알제 모텔로 데려간 것이다. 화면 가득 채워지는 인물들의 표정과 흔들리는 화면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더해져 관객은 그날 밤의 공포를 그대로 체험하게 된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이것이 단지 50년이나 된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도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알제 모텔의 백인 여성들을 경찰은 창녀 취급하고 왜 흑인들과 어울리냐고 묻는다. 이에 대한 대답은 기가 막힌다. “지금은 1967년이라고!”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세상은 이때에 비해 달라졌을까? 흑인에 대한 백인 경찰의 차별적 대우와 폭력에 관한 뉴스를 여전히 쉽게 접할 수 있는 지금 그에 대한 대답은 망설여진다. 이러한 인종차별과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목격자인 흑인 ‘디스뮤크스’다. 초반 ‘디스뮤크스’가 문제에 빠진 흑인 청년을 도와주려 할 때, 흑인 청년이 그를 ‘엉클 톰’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의 캐릭터가 설명된다. 사설 경비원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흑인도 백인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 그를 서게 만든다. 그는 일단 오늘 밤만 살아남자는 말을 하는 현실적인 타협주의자다. 하지만 그의 그 타협주의는 그를 살해 용의자로 지목받게 만든다. 기득권의 맞춰 타협하고 그 안에서 생존하려고 해봤자 그의 피부색은 그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재판이 끝나고 ‘크라우스’가 그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자 그는 구토를 한다. 그것엔 아마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자기혐오가 담겨있지 않을까.



 영화의 호흡이 꽤 길고 중반부 알제 모텔 장면의 에너지에 비해 전반부와 후반부가 힘을 잃는 것은 사실이다. 중심인물이라 할 만한 인물이 없이 너무 많은 인물들을 담아내려 해서 설명적으로 아쉽거나 후반부의 몰입이 떨어지는 점도 아쉽다. 특히 알제 모텔 장면의 표현방식의 집요함은 지나친 폭력의 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디트로이트>가 잘 만든 영화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그렇다’다. 하지만 이 영화가 좋은 영화냐에 대해서는 대답이 망설여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영화에서 보여주는 양립할 수 없는 태도다. 부족한 글솜씨로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완전히 전달하진 못하겠지만 대충 그 의도만이라도 전달되길 바란다.



 영화는 내내 질려버릴 정도로 클로즈업과 핸드헬드를 남용한다. 심지어 널찍한 공간이 있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답답할 정도로 카메라는 늘 제한돼있다. 카메라는 곧 시선이다.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를 가르는. 영화는 불편할 정도로 카메라를 흔들며 인물들에게 바짝 다가간다. 그 말은 지금 화면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을 가까이서 보라는 것이다. 초반 다큐멘터리를 활용하여 객관적으로 사건에 다가가려는 듯한 영화의 시선은 알제 모텔에서 완전히 달라진다. 영화는 모텔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다룬다. 아까 말했듯 클로즈업과 핸드헬드를 메인으로 해서 말이다. 미치 관객을 폭력과 인권유린의 장에 던져놓고 체험하게 하는 셈이다. 그것은 마치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에게 가해지던 루도비코 실험을 당하는 느낌이다. 이 극도의 리얼리즘 속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매우 직설적이고 명확해진다. 이것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한 시도가 아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명백하게 자신의 입장을 보여준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의 자막이다. 알제 모텔에서의 사건은 명확하게 정리된 사건이 아니기에 영화 속 장면들은 각종 자료조사와 증언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보여줄 것을 다 보여주고 말할 것을 다 말한 다음에 갑자기 마지막에 이르러서 한 발짝 발을 빼는 것이다. 이건 완전히 실화가 아니라 꾸며낸 사실이라고.

 순간 나는 벙찐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자막과 1시간에 가까운 알제 모텔 취조 장면은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그 현실적 묘사와, 그 과도한 핸드헬드와 클로즈업 사용은 대체 무얼 위한 것이었나? 자막에서 말한 것처럼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다면 이 영화의 그 장면들은 아무리 자료조사를 많이 했건 안 했건 픽션이고 일종의 선동이다. 그리고 애초에 맨 처음에 ‘크라우스’가 ‘칼’을 쏜 장면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당사자인 ‘크라우스’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들기 정말 싫지만 영화에서 경찰들의 변호인의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피해자들은 내내 벽을 보고 있었거나 방에 혼자 갇혀서 숨죽여 있었고 그들의 기억과 주장은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자신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표현했다. 아까 말했듯 그 현실적임을 강조하는 강압적인 카메라 워크와 함께. 이런 표현방식과 마지막의 그 무책임한 자막은 결코 한 영화에서 나올 수 없는 태도이다. 그럴 거면 애초에 그 부분에 관한 자막을 빼던가 알제 모텔의 표현 방식을 바꿨어야 했다. 감독은 마치 영화 속 인물 ‘디스뮤크스’처럼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타협자의 자세를 취한 모양새다. 영화 속 ‘디스뮤크스’의 마지막은 자기혐오적 태도로 이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가 내 결핍을 채워줄까?  -영화 <마스터>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